힘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나 나타나는 모습은 보여줄 수 있다. 1971년 우주인 스콧은 아폴로 15호로 달에 가서 손에서 깃털과 망치를 떨어뜨렸다. 달의 대기가 무시될 정도로 미미했기 때문에 깃털은 저항이 없이 망치와 동시에 달 표면에 도달했다. 그는 TV 중계방송에서 갈릴레이 씨 덕분에 관성의 질량이 중력의 질량과 같다는 가설을 증명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낙하산을 펼쳐 지상으로 착륙하는 스카이다이빙 장면 혹은 모습에서도 힘을 실감할 수 있다. 우주에 힘은 크게 4가지가 있는데, 중력, 전기, 자석, 등의 힘은 보이지 않아도 보여줄 수 있으며 설명하면 이해하고 넘어간다. 동양철학을 하는 자에게는 4가지 힘을 노양 노음 소양 소음의 사상 四象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 같다. 복희씨가 하늘과 땅 ‘사이’에 연못, 불, 벼락, 바람, 산, 물의 현상으로 팔괘를 만들었는데 팔괘도 사상으로 수렴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주에서 특정 운동의 지점을 특권화하고 우주의 무게를 설명할 때 사용했던 어법이 ‘위아래’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면 지구 자체가 무거우므로 물체는 그곳으로 움직일 것이고 중심은 어떤 다른 물체와도 동일시되지 않는다. 중심으로 향하는 물체의 방향은 절대적인 양으로 이론적으로 다른 어떤 방향으로도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지구 중심에 가까운 대상은 ‘아래’로 내려가고 그곳을 향한 운동은 더 ‘아래로’로 내려간다. 우리의 언어는 지구에서 ‘위아래’로 물체 운동을 설명하는 프레임에서 지구 중심을 향한 중력장에서 진화하였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근대 철학자들은 우주에서 운동의 주어가 언제부터 누구 혹은 무엇이며 대상을 중심으로부터 회전시켰을 때 생기는 ‘관성 효과’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뉴턴이 힘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용했다는 양동이 물의 사례가 있다. 보기에 따라, 양동이 물통에 끈을 이어 축에 매달고, 끈의 축을 중심으로 양동이를 돌리면 물의 표면을 주목할 수 있다. 처음의 물 표면은 지구 중력장 때문에 평평할 것이고, 다음의 물의 표면은 회전축에서 오목해질 것이다. 두 물을 양동이 안쪽의 주변 환경과 비교하면, 처음은 아무렇지 않은 듯 평평하지만, 나중은 멈추면서 휘어진다. 이때 처음과 나중의 운동은 물 표면에서 드러난 기계적 운동과 반 상관관계 anti-related에 있다고 말한다. 물의 오목한 표면이 물의 기계적 움직임을 보여준 것이라면, 기계적 운동 감각에서 고유 운동의 주어 혹은 주체가 누구이고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나온다. 뉴턴은 남들이 물이 정지해 있고 그 위의 공기로 구성된 주변 부분에서 운동과 현상 ‘사이’의 빈틈을 알아차렸거나 혹은 보고 있었을 때, 기계적 회전은 고유 운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수작업할 수 있었다.
뉴턴은 『프린키피아』 3권 주석에서 이미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으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모든 곳에 존재하시고 항상 존재하시므로 공간과 시간을 구성하신다’라고 하였고, 『광학』 「질문서」에서는 보다 노골적으로 공간은 하나님의 감각 기관, 즉, -센소리움 데이 Sensorium Dei -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중력이 발생하고 중력의 이차원인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했다. 두 저작 ‘사이’에도 절대 시간은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흐르나, 상대 시간은 절대 시간의 실제 지속에 대한 합리적인 형태일 뿐이므로, 절대공간과 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감각 기관으로서 하나님의 편재성과 영원성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요즘 중고등학교에서 중력의 원인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적으면 틀릴 것은 분명하다.
뉴턴은 양동이의 회전 운동이 고유 운동과 반상관 되었을 곳을 일컬어, 시간상 딱딱한 3차원 유클리드 공간에서 운동이 일어나는 ‘절대공간’이라고 명명한다. 라이프니츠는 물이 어느 순간에 양동이 측면을 따라 올라가는 높이에서 기계적으로 고유한 회전 속도를 측정하려고 하는 뉴턴의 눈높이를 무너뜨린다. 라이프니츠는 뉴턴이 말하는 절대공간의 임의 지점에서 속도의 변화율은 관찰할 수 없으며 그러한 변화율의 차이를 수반하는 절대공간도 허구라고 한다. 갈릴레이에서 실험자는 선실 내부의 관찰을 통해 배가 항구에 정지해 있는지 아니면 순조롭게 항해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 없다. 갈릴레오의 상대성 이론의 폐쇄된 시스템의 관성계에서 한 물체에 대해 어떤 물체가 다른 속도로 움직였더라도 임의의 지점에 대한 위치의 변화율은 같다. 하지만 뉴턴 역학에서 절대 속도는 회전을 포함하는 가속도는 실험적으로 결정할 수 없으므로 그 힘은 죽었다. 라이프니츠는 갈릴레이 시공간 기하학에 따라 공식화된 뉴턴 역학의 물이 회전에 대한 운동 관련 감각 속도를 가속도로 전환한다. 그것이 위치의 순간변화율의 변화율이다.
뉴턴은 『광학』 서문에서 “시간과 장소는 자체로 감각에 예속되지 않으나 감각 수단으로 물체의 크기, 위치, 장소, 운동 변화를 균일하게 만들 때”, 하나님이 신체를 지각하고 신체에 작용하여 행성 궤도를 주기적으로 유지하며 세계 체계를 개혁하신다고 설명한다. 뉴턴의 결론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플라톤주의자 무어가 하나님이 세계영혼이며 공간이라고 주장하였던 맥락에 놓여있다. 라이프니츠는 하나님이 이 세계에서 일하시는 어마 무시한 계획과 실천을 뉴턴이 말하는 방식대로 보고만 있지 않았다. 라이프니츠는 뉴턴이 대리자로 내세운 클라크와 서신 교환을 통하여 공간을 하나님의 센소리움으로 보는 뉴턴의 견해를 반박한다. 토론에는 출발점이 같고 논증과 반박의 목표가 분명해야 승패가 가려진다. 그런데 영국의 캐롤라인 공주가 중재한 이 서신 교환에서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광학』의 「질문서」에 나오는 구절을 클라크와는 다른 버전에서 보고 있었다. 뉴턴은 『광학』 2판 편집에서 ‘tanquam sensori suo’라는 구절이 첨가하였는데, 라이프니츠가 읽은 구절은 ‘tanquam’이 빠져있었다. ‘그분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시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며, 영원에서 영원까지 무한에서 무한까지 임재하며, 항상 지속하시고 어디에서나 임재하시고, 항상 어디에서나 존재하시므로 지속과 공간을 구성하시며, 하나님은 항상 어디에서나 한 분이시고 같으시다.’에서 ‘tanquam’의 부사는 ‘주의 감각 기관에 있는 대로’라는 은유이다.
뉴턴은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 Nihil novi sub sole이라는 성서적 근거에 따라 하나님의 작업현장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하늘 아래 새것이 없지만, 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이야기다. 뉴턴은 이 입장을 라이프니츠가 죽기 전까지 유지하다가 1730년 4판 편집에서는 ‘그의 센소리에 있던 대로, 사물들을 직접 보시고, 자신의 직접적 임재로 그들을 꽤 뚫어 보시고, 그들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시는 존재하시는 가운데 현상으로는 나타나지 않으신다.’고 수정하였다. 어쩌고 보면 우리가 매일 밤낮으로 보고 경험하는 하루의 빛과 어두움은 우리가 보지는 못할지라도, - 지구 자전과 달의 공전으로 말미암아 - 뉴턴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든든하게 살아갈 수 있었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빅뱅 이론에서 빅뱅 초기 단계까지 힘이 없는 물체는 수백억 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 있다는 뉴턴 이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라이프니츠는 힘이 죽은 물체보다는 무언가 스스로 힘을 내는 물질을 생각한다. 뉴턴의 1 법칙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뉴턴의 역학은 술술 이해할 수 있지만, 라이프니츠의 역학은 좀 이해하기 어렵다.
라이프니츠는 원자론 세계는 인정하나 뉴턴의 절대공간은 현실의 합리적 근원을 배척하므로 장소와 장소를 점하는 양의 차이를 없애기 때문에 반대한다. 하나님의 감각 기관인 놀이터를 세계전체의 모든 가능성을 무차별 앞에 세울지라도 들판의 장미꽃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스스로 피어날까? 이유 없는 뜻은 에피쿠로스학파의 위험이 된다고 La volonte sans raison seroit le hazard des Epicuriens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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