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장 45-7절에 따르면 예수는 낮 열두 시부터 세시까지 어둠이 온 땅을 덮을 때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 형장에서 큰 소리로 “엘리 Ἠλί 엘리 Ἠλί 레마 λεμὰ 사박다니 σαβαχθανί?”라고 부르짖었다. 그것은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거기 서 있던 사람들 몇 명이 이 말을 듣고서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라고 여겼다. 마가복음 15장 33-5절은 이 장면을 “엘로이 Ἐλωΐ 엘로이 Ἐλωΐ 라마 λαμὰ 사박다니 σαβαχθανί?”이라고 적었다. 그것도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뜻이다. 이 두 구절은 예수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했던 십자가의 칠언 七言 가운데 넷째 말씀이다. 아람어로 ‘엘리’와 히브리어로 ‘엘로이’는 동일한 하나님의 이름 엘 El에서 소유격 접미사 i가 들어와 나의 하나님으로 되었다. 복음서 기자들이 하나님을 각각 ‘엘리’, ‘엘로이’로 옮긴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아람어의 음역 때문에 얼핏 듣고서는 행간의 차이를 알아들을 수 없을 여지가 크다. 사형장에 있던 사람들이 엘리아가 와서 구해주려 하나보다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도록 설정된 측면이 없지 않다. 엘은 선사시대에 ‘우리 we’라는 주어의 복수형에서 ‘엘로힘’으로 불렀는데 족장 시대의 모세가 계시를 받으면서 ‘야훼 하나님’이라는 고유명으로 넘어갔다. ‘사박다니’는 아람어에서 ‘허락하다. 버리다, 용서하다’를 의미하고 ‘레마’와 ‘라마’ 역시 ‘왜’, ‘어째서’라는 의미다. 마태복음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에게 ‘주님, 불쌍히 여기소서, 키리에 엘레이송 kyrie eleison’라고 말했을 때처럼, 여기서 ‘키리에, 키리에’라고 해야 할 터인데 ‘엘리, 엘리’라는 아람어의 반복이 등장하였다. 누가복음은 23장 47절은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라고 말한 백부장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증인으로 내세웠다.
예수가 하나님을 부를 때 외친 외마디 소리는 제자들이나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에게 한 어떤 비유를 위한 말이나 겁박이 아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내 하나님, 내 하나님’으로 반복한 것은 시편 23장 1절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에서 나온다. 죽음에 대한 증인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해가면서 도대체 죽어가는 자가 ‘어떻게 시편 23장 2절을 인용하고 있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가 내 하나님을 부를 때, 무관한 구경꾼이 예수가 엘리아를 불렀을 것이라는 오해를 배제할 수 없다면, 이 말은 누구나 들을 수는 있지만 단순한 구경꾼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불과할 수 있다. 예수가 두 번이나 하나님 이름을 불렀을 때, 예수 좌우의 살인 죄인들을 제외한 당시 주위에 있는 자들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오만과 멸시로 웃기는 짓으로 알아챘을 듯하다. 예수 수난에 대한 오해를 신비주의자의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가까이 계신 하나님의 비상상태다. 창조 명령과 죽음과 생명의 로고스에 대한 해석과 주석이 필요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신들을 불경하고 모독하였다는 죄명으로 기원전 399년 아테네 법정에서 591대 80의 표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70 고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모습을 여러 단편에서 기록하였다. 소크라테스가 법정 변론에 나서자 501명의 배심원단은 281표로 유죄판결을 내렸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은 아테네의 실용적인 철학 교육을 통해 선한 일을 한 것뿐이라고 변론하자 80표가 늘어난 361표로 유죄 판결에서 사형 판결로 바뀌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원하는 죽음을 선택하여 감옥에서 독배를 마신다. 미나리 독초의 독기가 발에서 가슴으로 올라오면서 서서히 퍼져나간다. 그가 독약의 잔을 완전히 비웠을 때 하였던 이제 자신의 삶이 치유되었고 죽음이 최고의 건강임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의 제자 크리톤, 아폴로도로스가 스승의 죽어가는 모습을 앞에 두고 울고 심미아스는 비통한 심정을 드러내려고 머리카락을 짜른다. 소크라테스는 ‘자네들 뭣들 하냐? 내 이럴 줄 알고 여편네는 집으로 돌려보냈지’라고 외친다. 사람이 죽으면 조용히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들 조용히 해지자, 손발을 좀 만져보라고 한다. 온몸이 점점 차가워 간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사고의 힘으로 죽음의 시점을 규정하고 가까이 다가온 죽음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팔다리 마디마디마다 올려보고 내려다보며 쇠사슬에 묶인 발로 감옥의 복도를 따라 이리저리 걸어본다. 몸에서 의지가 해체되어가고 차츰 무감각해지는 것을 느낀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에서 떨어져 나가는 죽음을 규정하고 감정과 정열을 부정한다. 이윽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눈물을 멈추라고 명령한다. 그는 닭 한 마리 빚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 가운데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자기가 닭 한 마리 빚이 있으니 갚아달라고 부탁한다. 살아있는 자신과 죽어가는 자신으로부터 미래에 닭 한 마리 빚을 갚아달라고 철학자 동료에게 부탁하고 동료를 이를 지킬 것을 약속한다.
이 약속은 소크라테스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는 수탉이 새벽잠을 깨우는 꼬끼요를 외치도록 하는 이성을 낳았다. 새벽 수탉의 울음은 어둠을 몰아내는 외침으로 세상에는 삶이 지속하고 있는 이성을 알린다. 소크라테스는 태양 빛이 떠오르면서 닭이 외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닭을 통하여 아침을 향한 의지의 충동과 세계 이해를 일깨운다. 이것이 애쓰는 오성이다.
소크라테스가 죽기 직전에 행한 영혼 불멸의 논증과 그리스도 순교로 알리고자 한 진리의 전달은 각각 이성과 신앙에 속한다. 예수는 로마 병사들의 조롱을 받고 동족으로부터 저주받으며 인간이 두려워할 수 있는 가장 경악스러운 극악의 고통에서 돌아갔다. 예수는 가공스러운 죽음의 공포의 눈물로 부르짖으며 아바 아버지 안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마지막 순간을 눈물로 보내며 독배를 건네는 보초를 축복하였다.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단에게 말을 남겼다. “이제는 우리가 가야 할 시간이다. 나는 죽고 당신은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중 누가 더 나은 거래를 하게 될지는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숨겨져 있다.”
내가 믿는다는 진술은 ‘내’가 있다는 주어와 믿는다는 동사의 결합이다. 주어는 타자와 경계를 의식하며 사건의 중심에 서지만 늘 상대화된다. 신앙은 희망하는 것의 채움이고 보이지 않는 것의 확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번이나 하나님을 호명하면서까지 자신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죽음과 삶을 보여준다. 그것이 신앙이다.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는 삶의 현실이 채워진다는 것을 신앙하였다. 신앙의 대상은 사물도 삶의 정황도 아닌,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 존재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앞에서, 함께 하는 신앙의 길이다. 마가복음 8장 35절은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라고 한다. 삶을 구하면 잃을 것이고 목숨을 걸고 살 수 있다면 열어야 한다. 놀라운 믿음은 더 큰 것을 향하여 껑충 뛰는 주어의 선험적 열림이다. 마가복음 10장 5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심청의 임당수의 믿음 같은 아바 아버지의 믿음이다. 이성은 치킨 한 마리 값으로 소크라테스의 삶을 죽음으로 대치한다. 신앙은 죽음을 삶으로 바꾼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의 빚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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