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철학은 단순하다. 우리가 보고 지각하고 느끼는 현상은 진짜 세계가 아니라 영원불변한 이데아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에게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이데아에서 온다. 실제로 종일토록 눈 뜨고 보고 듣고 경험하는 현실을 둘러보아도 눈을 감고 잘 때 생각해보면 그럴 같기도 하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한다. 뒤이은 3절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한다. 여기서 바울은 플라톤을 원용하여 가시적 세계 뒤에 숨은 비가시적 세계를 강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국가』 7권에서 어두운 동굴에서 사슬에 묶여 살아가는 포로들의 상황에서 철학의 역할을 설명한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아테네 인근의 은광 광산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현실을 바탕으로 소재를 이끌어왔을 수도 있다. 철학의 역할은 어두움을 벗어나 밝은 곳에서 진리를 인식하는 길을 가리키는 것이다. 포로들 혹은 죄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습관적으로 동굴에서 거주하면서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철학은 이들이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가게 하므로 참된 진리를 인식하도록 이끌어주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가) 죄인들이 어두운 상황을 진단하고, 나) 동굴에서 벗어나서, 다) 태양 있는 동굴 밖으로 빠져나가 바깥세상의 모든 대상을 보고 진짜가 무엇인지 확인한 다음, 라) 그들의 옛 터전이었던 동굴로 귀환하여 그들을 해방하는 것이다.
죄인들은 어두운 동굴에서 쇠사슬에 팔다리가 묶인 채 살아간다. 그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장소의 후경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동굴 벽에는 횃불이 타오르고 있어 어두운 동굴 내부를 밝혀준다. 그들은 전후좌우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앞만 보게 되어있다. 그들이 정면으로 바라보는 동굴 벽에는 횃불에 의해 비추어진 대상들이 반사된다. 앉아있는 뒤편의 언덕길로 대상들이 움직이자 이들이 반사된 벽면은 마치 영화관의 스크린 같다. 그들은 자신들의 본래 모습은 보지 못하고 어른거리며 비치는 대상만을 바라본다. 오늘날 영화관 관객이나 TV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보지 않고 화면에 나오는 것들만 본다. 죄인들 가운데 한 명이 우연히 스스로 사슬에서 풀려나와 무리에서 벗어난다. 그는 횃불이 비치는 동굴 벽 위에서 외부로 나가는 통로로 발견하고 동굴을 빠져나간다. 바깥세상으로 나간 그는 태양을 보자 눈이 부시고 몸이 어지러워서 한동안 대상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차츰 빛에 익숙해지고 시력이 돌아오면서 주변에 놓인 사물들을 인식한다. 그는 태양 앞에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발견하자 동굴 안에서 살던 구습의 배경을 깨닫게 된다. 곧 지금까지 몰랐던 인식능력의 범위를 회복하면서 태양 아래에서 모든 존재자의 원래 근거를 발견한다. 죄인은 태양 아래에 펼쳐진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과거에 참으로 믿고 살았던 세계가 얼마나 왜곡되고 질곡이 되었는지를 안다. 죄인은 무엇이 참과 거짓인지를 알려주고 싶어서 철학자가 되기로 한다. 철학자는 이 상황을 구원하는 과제를 내적인 의무로 생각한다. 철학자는 동굴로 귀환하여 옛 동료에게 자신이 바깥세상에서 체험하였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 동료들의 몇몇은 변신한 철학자의 말을 듣지 않고 반신반의한다. 다른 동료들은 도저히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며 이자가 바깥세상 물을 먹고 돌아와 눈이 이상해졌다며 조롱한다. 그들은 다른 동료들에게 속지 말라고 타이르고 내부결속을 다짐한다. 이대로는 그냥 둘 수 없다면서 심지어는 죽이려고까지 하여 달려든다. 남아있는 포로들은 종전처럼 동굴 그림자만을 진짜로 여기며 살아간다. 철학자는 자신의 인식을 따라오지 않는 옛 동료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예수의 빈 무덤은 플라톤의 동굴과는 다른 상황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동굴 무덤에서 살아났고 제자들을 만난 다음 승천하였다. 승천하였기 때문에 그곳은 하늘나라에 속한다.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도 4가지로 구성된다.
아) 십자가 죽음, 야) 바위 동굴 무덤에서 부활, 어) 제자들 앞에 현현, 여) 승천이다. 아)→야)→어)→여)의 보이는 빈 무덤에서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에 이르는 과정이다. 3일 만에 부활한 예수를 기록한 신약은 로마서 10장 9, 고린도 전서 6장 14, 에베소서 1장 20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죽음 가운데에서 깨우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서 4장 24, 고린도 후서 4장 14, 갈라디아 1장 1 고린도 후서 2장 12에서도 하나님이 주어로 등장한다. 신학자 불트만은 하나님을 주어로 ‘예수는 케리그마에서 부활하였다.’라며 복음전달의 계속성을 강조하였다. ‘케리그마 κήρυγμα’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전달하고 선포한다는 약속을 말하는 신약의 언어다. 신학자 판넨베르크도 ‘예수가 깨어났으면, 세계의 종말이 왔다’라며 종말론의 소망을 강조한다.
신앙은 되는 데 목표가 있다. 믿으면 믿는 대로 되면 신통방통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가는 곳에 이성이 따라가야 신앙이 작동한다. 소크라테스는 의지대로 손발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몸이 잘 움직이는지 살폈다. 믿는 대로 잘 됐다. 반면에 예수는 자꾸 그러니까 주위에서 이자가 자결하러 가는가 보다 하며 추측했다. 하지만 빈 무덤만 남았다.
신앙은 의지하는 대상에 대한 이성의 자의적 승인이다. 이성이 수긍하지 않는 신앙은 맹목이고 의지가 승인하지 않는 신앙은 타령일 것이다. 존재나 사실에서 된다는 것을 믿는 신앙은 있어도, 안되는 것을 믿는 신앙은 없다. 신앙에는 이성과 의지라는 원플러스원이 필요하며, 이성과 의지의 평행선에 신앙의 성공을 설명하는 4가지 가설이 있다.
1. 아마 그럴걸: 주관적으로 신앙의 대상을 본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는 이성적 증거는 신앙적으로도 그렇게 본다. 하지만 신앙과 이성 사이는 벽이 막혀 신앙이 벽을 뚫지 못한다.
2. 정말 그럴걸: 객관적으로 신앙의 대상만을 본다. 신앙과 이성 사이는 무장애다. 신앙과 이성 사이의 벽이 뚫려 이성적으로 신앙의 대상에 도달하지 못할 장애는 없다.
3. 정말 그래: 신앙의 대상의 가능성에만 초점이 있으므로 신앙은 이성을 떠나 있다. 이 경우 신앙과 이성 사이는 벽이 허물어져 있다. 더 좋을 수 있지만, 더 나쁠 수도 있다.
4. 껑충 뛰어: 껑충 뜀의 가설은 신앙의 대상의 선험적 측면에 놓여있다. 이 경우 신앙은 이성의 벽은 차단되어 대상과 결별한다. 믿는 자는 신앙의 대상으로 곧바로 점프한다.
상기 4 가설은 하늘나라의 소망에 대한 신앙에 대한 이성적 문제 해결 모델이다. 어느 측면에도 절대 우위는 없다. 껑충 뜀에서는 지성이 할 수 있는 역할 제한 때문에 논란이 있다. 요한복음 8장 46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있느냐는 신앙의 문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죽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믿지 않는다.’. 이것은 이성의 문제다.
근대에는 자연과 하나님과 인간만 있다. 하나님은 공간의 총체다. 세계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만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생각하는 것만 존재한다’라는 유아론이다. 칸트는 아포스테리오리 한 인식과 아프리오리 한 인식을 구분하여 건너뜀의 영역을 탐구하였다. 전자는 경험을 전제하고 후자는 전제하지 않는다. 그는 경험이 전혀 물들지 않은 순수이성은 공간, 시간, 실체, 인과라는 4가지 사태에 대해 말하려고 할 때 엇박자에 빠진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들은 감각 표상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는 가상에서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갖지 않는다. 이들에 대해 말하려면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든 어느 쪽으로도 답변할 수 있다. 칸트가 말하는 바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통해 말한 이데아는 전부 가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나 이데아 세계는 이들에 대해 말하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는 이율 배반의 세계에 속한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걸고 증명하려고 하였던 영혼 불멸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불가지의 대상이다.
칸트는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도출하는 하나님 존재론 증명을 비판한다. 그는 누군가 “하나님이 존재한다”라고 말하면 그는 존재를 진술하는 개념에 새로운 술어를 추가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오직 ‘하나님’이라는 주어만으로 새로운 술어 없이 ‘하나님’ 개념과 관련된 대상을 진술했을 따름이지 진술이 증명은 아니다. 그는 단지 가능성을 표현하는 개념에서 주어진 대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고 추가한 개념이 없다. 그래서 칸트는 그렇게 말하는 자에게 “존재는 실제 술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한 사물 x의 존재에 대해 언명할지라도, 대상의 실재 속성을 완전히 표현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내가 지갑에 100달러를 갖고 다닐지라도 100달러 개념 안에 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위치가 없으면, -즉, 존재는 술어가 아니므로,- 내 돈은 가능한 100달러가 아니다. 칸트의 순수이성 영역에서 하나님 존재 증명은 불가능해졌다. 그러한 불가능한 지식은 중재할 필요가 없다.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봉정암 산행 (1) | 2024.09.12 |
---|---|
독립문 공원의 하녀들 (3) | 2024.09.12 |
38세 예수와 71세 소크라테스의 죽음 (0) | 2024.09.12 |
힘과 현상 (0) | 2024.09.09 |
뉴턴은 왜 하나님을 현상 뒤로 숨겼나? (2) | 2024.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