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퇴근하면 하루에 작정한 거리를 채우기 위해 독립문 공원을 걷는다. 공원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신경 쓰이는 광경을 목격한다. 젊은 여자들이 애완견을 공원 잔디밭에 놀리는 광경이다. 사유지가 아닌 공공 장소에서 자신들의 소유물을 마음 놓고 뛰놀게 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오면서 서로 간의 상견례를 베푸는 바람에 무리가 늘어난다. 지난해에는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붙은 잔디밭에 굳이 개를 놀리려면 개 공원으로 가라고 하였더니 오히려 당돌하게 다가오는 바람에 그냥 지나친 적이 있다. 개 사랑을 위해서 하는 짓이니 남의 취미 생활에 왜 간섭하느냐는 태도다. 비슷한 시간 대에 엄마 아빠와 함께 나온 어린이들이 잔디밭에 뛰어든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지켜보겠다. 하지만 부모와 함께 하는 아이들은 잔디밭으로 들어가지도 않는다. 개를 데리고 놀리는 여자들은 연령대로 보았을 때 생물학적 종족 번성이나 유지와는 무관한 개 놀이를 즐기고 있다. 최재천 같은 자는 자녀 생산은 가성비 때문에 재미가 없다는 이야기를 유튜브에서 한 적이 있던 같다. 꼴통 같은 생물학 전공자의 해괴망측한 소리다.
6월에 어디를 가더라도 호국영령의 달이라는 광고 문구가 뜬다.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죽은 영혼을 기념하는 추모하는 기간이라는 의미다. 독립문 공원의 명칭과 의미를 생각하니 여자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지하철 3호선 4번 출구로 나오면 광장 좌측에 독립문이 서 있고, 앞에는 독립관이 있고 우측에는 3.1 기념 탑이 있다. 이들이 개들을 놀리는 곳은 3.1 기념탑 전후의 잔디밭이다. 어둠이 깔리는 저녁이 되면 개들에 야광주를 달리고 행여나 주위에서 뭐라 할까 조심스럽게 순식간에 잔디밭으로 들여보냈다 나오게 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구한말 조선은 전쟁을 치르지 않고 외세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였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들어왔고, 덩달아 청나라도 들어와서 청일전쟁을 치렀다. 일본이 승리하자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 포기 항목을 승전조건으로 걸었다. 그 때문에 조선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중국 천자를 몰아낸다. 이를 기념하여 청의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관을 없애고 지은 건물이 독립관이고 세운 비가 독립문이다. 개들을 놀리기 위해 이들이 모인 것에는 화강암 대리석 계단과 벽은 3 1운동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서대문형무소와 독립관 사잇길에는 맨발의 유관순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일제는 36년간 조선을 지배하였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어 항복을 받아내므로 대한민국이 생겨났다.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남북분단은 고착되었다. 기록물 영상을 보니 김구가 평양에 갔을 때 희희낙락하며 흰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던 새파랗게 젊은 놈이 김일성 같았다. 그자는 스탈린을 등에 업고 전쟁 준비를 다 마친 모양으로 보였다. 나는 김일성이 밉다. 밉다고 그자가 만들어놓은 현재 북한 정권의 실체가 달라질 리 없는 사실 때문에 독립문 공원의 여자들을 말하고 있다.
여자들이 개들을 놀리는 잔디밭은 주변의 역사적 기념물의 상징성 때문에 신성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출입 금지가 강조된다. 여자들은 주변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들의 소유물을 바라보며 행복을 즐기고 있다. 고대 아테네시민은 아테네의 표준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르며 교양인과 구분하였다. 독립문 공원에 저녁 무렵에 개를 끌고 나온 여자들은 한국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무교양은 무개념이 아니라 무 이해다. 공원의 아무 곳이나 사족보행을 시키고 보도에서 개가 똥을 싸면 봉지에 담는 것을 보면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짓은 어디에 서 있는 곳이 어딘 지에 대한 무 이해 때문이다. 현충탑. 광주 민주화 묘역, 왕릉, 나치수용소, 히로시마 원폭기념관, 평양 열사 기념관, 모스크바 붉은 광장, 베이징 자금성 광장 등 어디에 서 있든 상관없이 내 개만 즐겁게 뛰어놀면 그만이다.
독일 핵물리학자 바이체커는 한때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들었던 한 물리학도의 에피소드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이 물리학도는 마침 하이데거의 헤라클레이토스 강의를 듣고, “한 마디도 이해 못 했다. 그게 철학인 모양이다.”라는 수강 후기를 남겼다. 무 이해가 철학인가? 시민공원에 개들 데리고 노는 여자들을 살펴보았을 때 그들의 의식은 견유학파 犬儒學派의 소산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견유학파는 개의 덕을 통하여 철학을 실천하였다. 개는 싫어하는 사람은 짓고 좋아하는 사람은 꼬리 치며 반긴다. 곧 개는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덕을 보여주므로 무엇이 지혜의 사랑인지, 곧 철학을 알려준다.
탈레스가 밤하늘에 별을 보다 우물에 빠지자 트라키아 시민 집안 출신의 하녀가 웃었다. 그녀는 천문학에 대한 무 이해에서 웃었다. 구경꾼은 그녀의 웃음으로 무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무지의 지, - 파이데이아 παιδεία -, 곧 교양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이데거는 트라키아 하녀가 철학에 끼친 역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철학을 위하여 이런 분들은 많으면 좋겠다고 해서 하녀에서 하녀들이라는 복수를 대체하였다. 깊은 심연에 빠진 현존재의 가까이 놓인 팽팽한 장면에서 터져 나온 웃음은 편심 상황으로 쏠리면서 누구나 다 웃게 되었다. 하녀들은 벌거벗은 진리 앞에서 보고 보았겠지만 말할 수 없는 것만 말해야 했을 것이다.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봉정암 단상 (2) | 2024.09.12 |
---|---|
봉정암 산행 (1) | 2024.09.12 |
38세 예수와 71세 소크라테스의 죽음 (0) | 2024.09.12 |
플라톤의 동굴과 예수의 빈 무덤, 하나님 존재 증명 (0) | 2024.09.12 |
힘과 현상 (0) | 2024.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