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파리가 유리병으로부터 나오는 길을 가리키므로 철학의 목표를 제시한다. 철학의 과제는 파리에게 나가는 길을 가리키고 보여주는 일이다. 그는 『노트북』 33.11에서 그림과 명제의 차이를 말하고 그림을 부정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가 이렇게 묻는 까닭에는 명제와는 달리 보여주는 그림에 언어화될 수 없는 체험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중부 유럽 빈의 가장 부유한 철강업 가문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는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에 재학하던 중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 그는 먼저 배에서 그다음에는 포병 작업장에서 복무하다가 우발적 폭발로 부상하여 크라쿠프 병원에 입원했다. 1916년 3월 복귀한 그는 오스트리아 제7군의 소속의 동부 전선으로 오늘날 폴란드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러시아의 브루실로프 6월 공세가 시작되면서 그는 적의 집중 포화 속에서도 노출된 전방 관측소를 관리하는 임무에 자원했다. 포병 사격을 지휘하는 전방 관측소는 적의 특별한 표적이었기 때문에 매우 위험했다.
러시아군은 집중적인 공세를 시작하자 그는 밤마다 후퇴하면서 『전쟁일기』를 적었다. 지쳐서 거의 말에서 떨어질 뻔했고, 전쟁은 적과 마찬가지로 동료도 짐승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사상은 빛에서 일했고, 진리는 그 자체로 여명과 동격이었다. 오늘 살지 내일 살지의 최종 근거는 불확실성 앞에 놓인 빛의 탈취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아마 우리는 공격을 받을까 겁난다. 총에 맞았을 때 어떻게 행동할까? 나는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까지 의무를 다하지 못할까 두렵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힘을 주시기를. 아멘. 아멘. 아멘. 아멘.”이라고 기도했다. 비트겐슈타인은 계속해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고”, 지금은 죽음과 마주하고 있기에 자신이 괜찮은 인간이 될 기회이므로 “영이 자신을 깨우쳐 주시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를"이라고 적었다. 나아가 5월 말 관측소에서 "지난 두 달 동안 자위행위를 단 3번만 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비트겐슈타인은 퇴각 후 훈장을 받았고 10월에 모라비아의 올뮤츠에서 장교 훈련을 받은 후에 중위로 진급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전선으로 파견되어 1918년 6월 오스트리아 공세에 참여하였다가 11월 3일 이탈리아군에 포로로 잡혔다. 그가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는 동안 동료 수감자가 자신의 여동생을 그림으로 그렸다는 사실을 우연히 언급하면서, 그가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일원임을 알려진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곳에서 1918년 말에서 1919년 여름까지『논고』를 썼다. 그는『논고』에서 논증이 타당성 여부를 기계적인 방법으로 판별하는 "진리표”를 발명하였는데 이로써 러셀과 프레게를 넘어서는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때 쓴『논고』로 1929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박사 학위 논문으로 채택되어 논문심사를 통과하였고 10년 후에 무어의 후임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가 러셀과 무어에게서 구두 시험을 치렀을 때, 시험관의 어깨를 두드리며 “너무 어려워 마시오. 내 당신이 내 논문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소.”라고 다독거린 일은 유명하다. 무어는 논문평가 보고에서 “이것은 천재의 작품이다. 내가 완전히 착각하고 별것이 아니라고 여길지라도, 철학박사 학위 Ph. D. 수준을 넘어선다.”라고 기록하였다.
그가 제시하는 언어 이론에 따르면 『논고』는 아무 말도 할 말이 없는 문제를 다룬 글이다. 이 세상에서 어떠한 진술일지라도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논고』의 결론은 그의 전쟁 경험담을 떠올린다. 누구라도 전쟁 경험을 했거나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 군대 이야기를 할 말이 많을 것이고 시작하면 끝이 없다. 더군다나 생존자의 말은 그만큼 장황하고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전투에서 방공호를 파거나 사냥을 위해 덫을 놓는다면, 이러한 설계의 주격은 진리를 전시하기 위해 기술한다. 그들은 포로나 사냥감을 붙잡으므로 사유의 승리를 가져다주는 개념을 붙잡아 전시할 수 있게 해놓은 설비이다. 개념은 직접 보고 만지도록 붙잡아 놓은 사유의 전유물로서 하시何時라도 자신의 신변이나 주위에서 좌지우지할 수 있다. 우리의 주변에서 개념이 획득되는 과정을 살피다 보면 하다못해 갓난이도 온몸을 총동원해서 무언가를 붙잡으려 하면서 개념을 터득한다. 전쟁에서 개념을 잡기 위해 만든 투석이나 총이나 활이나 대포는 과녁을 겨냥해 발사하므로 원격 작용을 보여준다. 쾅, 쾅, 우지직 탕이라는 의성어나 쏘다 던지다 와 의태어의 배경 활동은 목표물을 명중시키므로 개념을 파생하게 한다. 개념은 사유대상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즉 이론으로 사유하는 동안에는, 생산 결과에 현존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동부 전선 포병 관측소에서 감각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대상을 현재화한다. 직접 보고 만짐을 대치하는 직관으로 거리 간격을 계산하는 이성보다는 빛의 개념과 함께 참호 속에서 일하며 기도했다. 대포의 목표물이 주어진 일정한 거리의 전망으로부터 가시적으로 비추어지기 전까지는 빛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일정한 전망에서 비추어지면, 비추어진 결과는 빛이 대상에 마주치는 각도에서 온 값이다. 존재 자체는 빛으로 대상에서 얻으려는, 잡으려는 것과 같아진다. 진리는 그 자체로 각 면에 나타난 선물일 뿐만 아니라 현상에서 노동을 가정해야 하는 상품인식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현실과 직접 맞닥뜨릴 때 직접 촉각을 최종 직관으로 대치하므로 짊어지고 있는 개념의 짐을 덜어내려 놓았다. 개념을 직관으로 대치하고 자신과 사물과의 직접적 마주침 사이에 위험한 거리가 놓인다. 비트겐슈타인은 전방의 방향을 돌려 후방으로 후퇴하며 생사 일여 生死 一如의 지평에서 4번씩이나 아멘으로 기도한다. 스스로 언설 불가를 언어적으로 제시하는 곳에 개념적 가정의 절대 형식이 있다. 이곳에서 마음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미지나 그림은 단어나 개념적 구절로 번역될 수 없다. ‘이렇다저렇다’라는 판단 자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근거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같은 연도에 태어난 하이데거는 세계 내에 ‘던져졌다’라고 표현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1616년 10월에 올뮤츠에서 친구가 되었던 폴 엥겔만이 보내온 루트비히 울란트의「에버하르트 백작의 산사나무」의 시를 읽은 다음『논고』의 결론이 좌초한 이유를 적었다. 그는 답장을 보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 없게도 말한 것 속에 들어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발언한 것에 담겨있다고 여기므로 "말할 수 없음”에 대한 표현으로 "보여주고 말하기”를 행동으로 실행하였다.
「에버하르트 백작의 산사나무」시는 십자군 전쟁에 성지 점령에 나선 에버하르트 백작이 사물을 어떻게 보았는가를 보여준다.
수염 난 에버하르트 백작은 뷔르템베르크의 영지에서 여행을 떠났다. 어느 날 그는 봄에 숲길을 달리다가 산사나무 덤불에서 작은 가지를 꺾어왔다. 그는 철제 투구에 산사나무 가지를 꽂고 전쟁터로 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땅에 심었다. 그러자 잎과 새싹이 살아났다. 충실하고 진실한 백작은 매년 나뭇가지로 왔다. 그는 그것이 그렇게 크게 자라는 것을 보고 기쁨으로 가득 찼다. 백작은 나이가 들면서 나뭇가지는 나무가 되고, 노인은 그 아래 노인은 가장 깊은 명상에 잠겨 앉아 있었다.
이 시 전체는 수염 난 백작의 백일몽에 관한 이야기로 “말하기”와 "보여주기”를 예시한다. 『논고』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사실 "말도 안 된다”(6.54). 비트겐슈타인이 에버하르트 백작이 투구에 꽂은 산사나무 가지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의 모습을 의미하였을지라도, 말도 안 되게 그 자체로 이미지의 모습을 보여주므로 그 의미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만큼 좋은 말을 하기는 어렵다.
비트겐슈타인은“내가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나는 날씨에 대해 모른다(4.461)”라고 빤빤스럽게 기술한다. 무어는“비가 오지만, 비가 오는 것을 믿지 않고”, 그리고 “비가 오지만, 비가 오지 않음을 믿는다.”라고 뻔뻔스럽게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무어와의 인식론에 관한 토론에서 ‘무어는 좋다'라는 명제로 ‘무어'가 잔디밭 왼쪽에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이 잔디밭 언덕으로 무어를 쫓아다니며 여기, 혹은 저기 하면서 빤빤하게 보이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그가 한 말의 의미는 뻔하게 보이는 것의 임의적인 부분에만 적용된다. 빤빤하게 보여주는 말의 논리적 속성은 임의적이지 않으며, 그 말의 의미를 다른 명제로 말할 수 없다.
『논고』는 모든 것이 경우가 될 수 있는 세계에서 시작하지만, 경우가 될 수 없거나 경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곳에서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금지로 끝난다. 예를 들어, 잔디밭 “출입금지”라고 적혀있는 곳에서 "말하기”와 "보여주기”에는 겉보기 사실 뒤에 있는 현실, 즉, 겉모습에서 언어 게임이 있다. "난센스 시”는 난센스가 아닌 같이, 잔디밭을 밟고 다니며 자신과 개를 "보여주는” 것은 난센스가 아니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개념적인 것과 비 개념적인 것 사이의 틈새에서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면, 철학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철학이 말없이 보여주지는 않지만, 난센스가 아닌 "보여주기”는 철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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