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철학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문맥의 맥락과 사용 용도에 따라서 의미론을 구축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단어나 말이라도 그의 사용 용도에 따라 의미를 알아 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 노동 현장에서‘벽돌!’이라고 말했다면, 발화 사용자의 발화에서 일어난 상황의 분석으로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쾅’이라는 단어를 듣는다면 그것은 발화와는 다른 차원에서 일어난 사태에서 그 의미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발사대에 선 누리 호를 TV로 시청하다 ..., 3, 2, 1, 0의 카운트를 듣는다면, 보는 것은 단어가 가리킨 대상의 직접적 사태이지 말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벽돌’이 일하는 동료들의 의사 소통 사태를 기술하는 대상 언어라면, ‘쾅’이라는 의성어는 일어난 사태를 직접 지시하는 대상 언어다.
‘착검, 실시! 차례 총! 앞으로 전진, 뒤로 후퇴, 원위치로!’라는 대상 언어도 있다. 이 단어 그룹에는 목표물을 치고 찌르고 빼고 원위치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있다. 뭐가 뭔지 모르지만 군대 생활한 자들은 한 번도 써먹어 보지 못한 훈련 때문에‘ㅈ 뺑이 쳤다.’라고 말한다. 헛고생했다는 말이겠다. 요즘은 참수 훈련이라는 것을 한다는데, 옛날에는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한 번도 써먹지 못하는 훈련을 하였다.
갈릴레이는 지구가 스스로 돌아간다고 했다. 팽이도 쳐야 돌아가는데, 아무 누구라도 치지 않은 지구가 저절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갈릴레이는 아무 누구도 못한 말을 질러버린 까닭에, 말이 가져오는 사태에 대한 증명 부담으로 종교 재판 끝에 우울한 말년을 보냈다. 팽이를 예시로 보면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었던 생각은 굴러온 돌로 박힌 돌을 빼내려는 전략이었다. 단테의 지옥의 기하학적 위상을 연구한 다음, 당대까지 지배하던 천동설을 공격한 것이 주효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는 지구에서 천구를 보았을 때, 그는 지구가 그 자체로 부동의 우주의 중심이라는 전통적 생각을 부수고 싶었다. 거의 2000년 가까이 머릿속에 들어있는 영원 불멸의 천구라는 생각 자체가 불변이었던 가운데, 생각, 혹은 ‘돌덩이’를 무슨 수로 빼내서 반박한단 말인가? 지구가 박혀있던 자리에 태양을 집어넣고, 태양이 있던 자리에 지구를 갖다 놓고 슬쩍 바꿔치기하면 된다.
일찍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상하 上下의 천체를 놔두고 모든 자연 사물은 본성상 그들의 본래 장소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말에도 사람이 죽을 때도 ‘돌아가신다.’하는 어법에 따라 돌아가시는 곳을 살펴보면, 그곳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모든 원소가 도달하려는 자연적 장소에 그다지 멀지 않아 보인다. 돌멩이 같은 무거운 물체는 아래로 내려가려 하고, 연기같이 가벼운 원소는 위로 올라가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를 달 위와 달 아래의 세계로 나누고, 월하의 세계의 모든 원소는 제자리에서 올라가거나 내려가더라도 생성 소멸한다고 기술하였다. 월상의 세계는 모든 운동이 원 운동하기 때문에, 부딪치거나 충돌이 없이 가장 이성적이며 조화로운 질서로 영원하다.
중세 이론가들은 지구 구체의 불안전성과 모든 부분의 활동이 전체 질량에서 불안정한 작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더 멀고 더 넓은 자연적 장소를 생각하였다. 그래서 모든 자연적 운동 과정의 최종 원인을 가장 높고 가장 바깥의 천구의 꼭대기로 모셨다. 그곳은 전체 우주에서 가장 외피의 운동궤도의 천구가 놓여있어서 다른 천체를 움직이고, 외부에서 내부로, 위에서 아래로 물리적 실재의 위엄을 나타내 보인다.
천구의 동심원 중심에서 바라보는 순수 사유는 모든 다른 천체 운동의 궤적을 반성적으로 종결한다. 탈 우주적 절대적 부동 자는 모든 인과적 연관을 지니는 세계 기능을 가장 외적이고 가장 높은 천구에서만 작용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외적 운동이나 지속적 작용을 강요하는 운동의 예시로 우 차를 들었다. 우 차는 소가 갈 때만 움직인다. 이 체계의 내부 공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움직여지기 때문에. 복판에서 좌우로 벌려야 하고 밑에서 위로 올라가며 조져야 한다.
갈릴레이는 지구의 자전 운동을 물리적으로 증명하는 예시로 조수를 고려하였다. 그는『두 세계의 대화』의「밀물과 썰물의 대화」편에 조수는 지구 자전과 그의 태양의 공전으로 지표면에서 바닷물이 쏠리고 밀리는 현상이라 설명한다. 예로 양동이에 담아둔 물을 흔들면, 그 안의 물은 양동이의 속도로 인하여 중심에서 주변으로 쏠린다. 이렇게 보았을 때 조수도 마찬가지로 지구의 일일 자전 속도에 의한 바닷물의 속도 때문에 하루에 한 번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네치아 사람들은 하루에 12시간 간격으로 두 번이나 조수를 보았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러한 진리판단 기준에서 당시나 오늘날이나 우리나라 서해안 마을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갈릴레이의 주장은 헛소리나 다름없다. 오늘날도 지구의 태양 공전을 인지하지 못하는 한에서 해가 뜨고 지구가 움직였다는 것을 느꼈다는 사람을 발견하기 어렵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미쳤다고 할 것이다. 지구와 달의 인력을 인지하지 못하는 한에서 조수가 하루 한 번만 일어난다고 한다면 미친 소리를 듣기 마련이다.
케플러는 불타오르는 태양의 화염 덩어리에서 지구와 달의 인력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달이 조수를 야기한다는 주장은 쓸데없는 허구라고 비난하고, 행성 궤도는 완전한 동심원 구로 생각하며 케플러가 제시하는 행성 운동 궤도의 타원형 설명을 거부하였다. 갈릴레이는 경사면에 공을 굴려서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이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누가 언제 어디서 쥐도 새도 모르게 무엇인가를 위에서 아래로 떨어뜨려 놓고, 지동설을 증명하였고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보며 오늘도 지구가 도는 것을 느낀다고 말할 것인가?
17세기 신학자들은 성경 구절 여호수아 10장 12절 13절에서 갈릴레이 운동 이론의 약점을 추궁하였다. 이 구절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외쳤다. “태양아, 기브온 위에 머물러라! 달아, 아얄론 골짜기에 머물러라!”라고 되어있다. 의미인즉, 여호수아가 주님께 아뢰니 백성이 그들의 원수를 물리쳐 정복할 때까지 태양이 멈추고, 달이 멈추었다는 말이다. “야살의 책에 해가 중천에 머물러 종일토록 지지 않았다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태양이 하루 종일토록 멈췄다. 지구가 움직이지 않고 해가 중천에 지지 않고 있었다면, 시간은 정지하고 있다는 물리학적 주석이 가능하다.
여호수아의 명령이 지구 운동을 정지시키면,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 곳이나 해가 종일토록 지지 않았다는 곳은 은유적으로 인간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곳이면 어느 곳이라도 될 가능성이 크다. 물리학과는 달리 형이상학적으로 보았을 때, 아무 누구라도 언제 어느 곳이 사라진 때에 언제 어느 곳의 무엇인가를 빼거나 끼워 넣는 일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쉽다. 가을이 되면 떨어뜨리는 낙엽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낙엽은 엄청난 증명이 필요 없는 시각훈련이다.
만추의 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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