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은 자연을 넘어선 대상을 탐구하는 철학의 분과이다. 왜, 세계가 존재하는지, 영혼이 있는지 혹은 정신이 존재하는지, 하나님이 계시는지, 계시면 알 수 있는지, 등, 주로 최후의 물음을 다룬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감각적인 경험 한계를 넘어선 인식의 요구 때문에 지난 세기에 혹독한 비판을 받아왔다. 그래서 우리가 멀쩡한 오감의 감각 기관으로 세계를 지각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과학 이외 철학에서는 버팀목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칸트는 『미래 형이상학 서설』에서 수없이 많은 외부세계 실재의 존재 증명을 해왔지만 성공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는 철학의 스캔들이라고 우려하였다. 칸트는 외부세계는 우리의 관찰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으로서 물 자체이므로 형이상학은 불가능하고, 형이상학이 가능하더라도 단지 나타남 불과하므로 말하기 어렵고 아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형이상학의 목적이 적어도 외부세계의 주관화에 관심이 있다면 어떤 것이 확실한지를 승인하는 물음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향이 필요하다고 한다.
인간에게 굳이 필요한 인식론적 관심은 일정한 결과들이나 지식 상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대상을 알 수 있을까 하는 지식 가능성 조건이다. 말하자면 알아보고 싶은 대상의 인식 조건은 인식 대상의 조건으로 주어져야 한다. 칸트는 상이한 사건들 사이의 통상적인 나타남에서 필연적 인과성을 부정하므로 외부세계의 존재에 대한 흄의 회의론은 철학적 항복 선언이라고 진단한다. 그의 회의론은 외부세계를 인식하는데 거부할 수 없는 전제이므로 자신에 빠져있을 법한 독단론의 선잠을 깨운 것이라고 술회하였다. 그래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철학은 인식 조건들을 알고 지식의 한계를 정하므로 경험 한계 내에서 지식이 가능한지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말 그대로 순수 이성을 비판하였다.
흄은 『인간 오성론』에서 결단코 내일 해가 뜨는지를 알아내는 지식은 없다고 단언한다. 내일 해가 뜰 것이라는 판단은 반복하여 뒤따르는 경우들의 관념 연합이다. 그래서 내일 해가 뜰 것이라는 생각은 미래에도 마치 인과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오성이 조작하므로 기대하게 되는 믿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흄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는 판명한 사건이지만 후자는 어떤 방식에서라도 전자의 관념에 포함되어있지 않다. 당구공을 예로 들자면, 한 공이 움직이고 다른 공이 정지하여 이들이 서로 다른 어떤 위치에 놓일지라도, 마음은 ‘시간적 선행과 공간적 근접’에서 원인과 결과를 찾아내지 못한다.
관찰하는 상존적 인과 사태에 대한 가정을 지식으로 보는 것은 인간 본성의 원칙이지 세계의 사태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과 관념은 반복된 경험으로 쌓아진 인상들에서 습관적으로 생긴 것으로 인간 본성이 만들어낸 것이다. 경험적인 근거에 의하여 한 과정이 다른 과정에 결부되더라도 거기에 어떤 필연적 연결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일 해가 뜰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이 물음을 연역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흄은 내일 일출을 인식론적 귀납 문제로 본다. 지금까지 항상 해가 떴다는 관찰로부터 내일 해가 뜰 것이라는 사태를 추론하면, 결론은 고도의 확률로 알아맞히는 일이다. 기막히게 맞히더라도 전제로부터 결론으로 가는 필연성은 없다.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가는 귀납 논증은 전제의 확장에 여하한 필연성도 인정되지 않는다. 정확하게 ‘내일 해가 뜨지 않을 것이다’라고 해도 무방하다. 틀리면 된다. 내일 일출 불가에서 진리는 다음날로 정해진다. 그리고. 다음날 또다시 내일 일출 불가라고 주장할 수 있으며, 언제라도 사실의 반대는 가능하다.
누군가 ‘내일 해가 뜨나?’라고 궁금할 때, ‘오늘 해가 떴다. 어제도 떴다. 고로, 내일 뜰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오류 추론이다. 나타남은 내일 가봐야 안다. 그래도 ‘내일 뜰 것이다.’라고 해도 내일 가봐야 한다. 태양이 내일 떠오르지 않게 되리라는 것은 태양이 내일 떠오르게 되리라는 주장보다 더 많은 모순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어난 일의 반대는 모든 시간에 가능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모순적 결론으로 닫혀있지 않고 열려있다.
결국, 내일 일출을 아는 물음은 지식이 확실한지 아니면 확률적인지의 물음이다. 일찍이 마르셀 푸르스트는 외부세계 실재를 증명하려던 자가 마지막에는 옴짝 달싹 못하고 시달리다 “하나님의 이름으로”라는 신앙고백을 하였다고 전한 바 있다. ‘내일 해가 뜰 것이다.’라고 하면 진술의 진위에 걸리고, 사실로 나타남은 기댓값과 관련된다. 라이프니츠는 이와 같은 기댓값을 아예 0과 1 사이의 2분지 1이라는 확률을 놓고, ‘해가 난다’와 같은 우연적 진술이라고 하였다. 우연적 진술은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는 그렇고 그런 진리지만, 확실하고 필연적인 논리적 진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베르누이는 그의 『추측술』 1부에서 하위헌스의 기댓값의 이론을 요약하고, 4부에서 확률이란 아는 것의 확실성의 등급이라는 개념으로 확률 이론을 창시하였다. 확률 이론 확립에는 하워헌스나 라이프니츠와 같은 대가들의 도움이 컸다. 하위헌스는 빛의 파동이론을 세우고 토성 가까이에 있는 별들 가운데 규칙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타이탄 위성을 발견한 다음, 『세계관찰자』에서 지구가 도는데도 지구가 도는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외계 생명의 존재 가능성에 확률 논증을 적용하였다.
외부세계 회의론에는 우리의 표상 외부의 대상이 물질적 공간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고 보거나, 외적인 대상의 존재를 알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칸트는 시공에 연장된 물질적 물체가 우리의 고유한 표상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선험적 관념론으로 통상적인 관념론, 즉, 버클리, 데카르트, 로크 등을 반박한다. 시공은 감각적 직관 형식으로 우리 감각의 가담 없이는 알 수 있는 것이란 아무도 없다. 물 자체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물질적 대상의 존재를 알 수 있다는 것은 현실이 우리의 표상이고, 기본적으로 직접 지각하는 몸도 정확하게 나의 표상에 어긋남이 없다는 것이다.
관념론을 조여 가면, 오르지 생각하는 본질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은 없고 나머지 것들은 직관에서 지각할 수 있을 정도이고 생각하는 본질의 표상일 뿐이다. 관념론을 느슨하게 풀어놓으면 우리 외에 감각적으로 놓인 대상이 지더라도 오직 물 자체인양하면서 아무것도 모른척하며 지내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나타남만을 알고 우리의 감각이 촉발되는 한에서 그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고 싶다. 기껏해야 강아지를 키우면서 이놈이 어쩌는지를 보면서 남에게 이러 저러한 사실들을 이야기한들 개와 사람을 똑같이 놓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어쩌면 우리가 칸트의 선험철학 체계 내에서 우리의 고유한 표상을 직접 지각하면서 외부세계의 확실성을 반박하려는 회의론의 논증은 좀 비싸게 먹힐 수 있다. 어렸을 때 정월 대보름에 동해안에서 하였던 망월 놀이가 있다. 빈 깡통에 못으로 구멍을 숭숭 뚫은 다음 그 안에 나무 조각을 넣은 다음 넣고 불을 지펴 깡통에 쇠줄을 달아 돌리면 불이 활활 타오른다. 깡통 불놀이를 하면 어두운 밤에도 이곳저곳에 원의 환으로 돌아가는 불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저 멀리 ‘도깨비불 보라’라고도 외친다. 지구가 해를 돌 때 달도 따라 원의 환처럼 돌 텐데, 둥글게 돌아가는 깡통 불처럼 달아, 달아, 너도 돌아라. 확실히 이 놀이는 경험적 지식의 한계를 벗어난 인식 가능성에 속하지만 요즘 촛불 혁명이니 뭐니 하면서 길거리에서 뛰어다니며 헉헉거리는 것보다 더 큰 희망으로 내일 일출 확률을 채울 수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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