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무엇을 참이라고 진술할 때 관련되는 개념이다. 말을 꺼내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맞으면 참,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다. 이것은 참과 거짓을 수동적으로 구분하는 기준이다. 가만히 있으려고 거짓을 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능동적이다.
현대 논리학자 타르스키는 일상 언어에서 사용하는 참이라는 관념을 도입하여 진리 개념을 분석하였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진리는 사실과 표현, 혹은 진술의 적합한 일치이다. veritas est adaequatio intellectus et rei라고 이른다. 어떠한 진술이라도 말로 외부세계 사태를 정확하게 기술하여 표현한다면 참으로 본다. 타르스키는 일상 언어의 참의 관념을 형식 언어에 담아서 진리 개념을 명료하게 하였다. 형식 언어란 참이나 거짓을 진술하는 표현들을 취급할 수 있는 엄격한 형식적 틀이라 할 수 있다.
가령 누군가, 눈이 올 때, 만약 “눈이 온다.”라고 발화하였다 해보자. 이 표현을 담는 형식 언어의 형식은 “무엇무엇”은, 만약 그리고 오직 만약 “무엇무엇”이면, 참이다. 이때 앞의 따옴표에는 “무엇무엇”의 내용이 들어가고, 뒤에는 진술에 상응하는 “무엇무엇”이라는 사태의 기술이 들어간다. 전자에는 "x"라는 부호를 넣고 후자에는 "p"라는 부호로 대리하게 하여 일상 언어 담론에 등장하는 진리에 관계하는 표현들을 형식화된 언어 안에서 나타내므로 진리 개념을 드러낼 수 있다. 이러한 진리 개념은 길거리, 동사무소, 법원, 공항, 그 밖의 공공 장소에서 사람들이 언어적으로 주고받는 의사 소통 상황이라면 큰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다.
타르스키는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 명제, 판단, 주장, 진술, 신념, 견해, 등은 다양한 언어 그룹에서 만들어질 수 있으므로, 특정한 하나의 L 언어에서 참이 될 수 있는 이론을 창안하였다. 어떤 진술을 형식화된 언어에서 표현하려면, 이 L 언어에서 “x”는 만약 그리고 오직 만약 p이면, 참이라고 규정하므로 사용한 말의 의미를 확정할 수 있다. 여러 나라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누군가 대상에 관한 사태로서 영어로 “It rains.”라 하면 그것은 대상 언어이지만, 그 진술을 한국어로 “비가 온다.”라고 시인한다면 그것은 메타 언어가 된다. 대상 언어와 메타 언어를 구분할 경우 진리 개념의 손상 없이 한 명제에 대한 진위를 결정할 수 있다. 이런 구분이 불가능할 경우 해외여행에서 한국어로만 진리 개념을 펼치는데 고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타르스키 진리관은 현대의 언어 분석 이론에 영향을 미쳤지만 “참”이라는 진리 술어를 과잉으로 사용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뻔히 보이는 들판에서 “‘풀은 푸르다’라는 참이다”를 매번 말하거나, 교황이 선포하시는 말씀 모든 것은 참이거나, 형님이 말하시는 ‘거시기’는 항상 참이라고 말한다면, 진리 개념을 헤프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 개념을 절약되고 절제된 문맥에서 활용하기 위한 인식론적 언어 사용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
요즘 신문 지상이나 방송 매체에 등장하는 견해나 주장들에는 어느 특정 신념 체계에 따라 움직이는 진영논리가 있는가 하면, 발화공동체 구성원의 합의를 바탕으로 작동되는 인식론적 입장이 있다. 그런데 이들에서 중요한 부분은 정당화된 신념이다. 어느 입장에 서던 자신들의 견해나 주장이나 신념이 인식론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아무리 든든한 신념이 있을지라도 어느 누군가 혹은 사물로부터 보증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식이나 신념의 정당화에는 통상적으로 외재주의와 내재주의라는 전략이 있다. 외재주의는 외적으로 정당화하므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고, 내재주의는 내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으면 정당화된다고 본다. 예로, 미적분계산법을 발견한 원저자들은 그들의 진리를 외재적 혹은 내재적으로 정당화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양자의 미적분계산법의 지적인 소유권을 공동으로 인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형식화된 이상화된 조건에서 한국어를 대상 언어로 하고 영어 또는 외국어를 메타 언어로 하였을 경우, 한국어도 두 언어 공동체가 있고, 지역이나 방언에 따라 진리 술어는 다양하다. 어느 누군가 서로 싸우다 ‘피가 난다.’라고 말했다면, 진리의 인식론적 정당화는 오류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지만, 핏방울의 지각에 대한 진술이 참일 근거를 뒷받침해주는 사실과 진술에 대한 강한 혹은 약한 증거를 보여야 맞든 혹은 틀리든 할 것이다. 어쩌면 싸워 이겨야 뒷소리가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영국의 케임브리지에는 도시를 가로지르며 캠 강이 흐르는데 강변에는 잔디가 깔린 경치가 좋은 카페들이 많다. 케임브리지를 거쳐 간 무어와 비트겐슈타인은 이곳에서 외부 세계의 존재 증명에 관한 유명한 논쟁을 벌였다. 무어는 화들짝 양손을 들고 오른손으로 “여기에 한 손이 있다!”라고 말하고, 왼손으로 “여기에 한 손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으로 무어는 자기 자신의 진술로 자신과 외부세계가 연결되는 존재 증명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자신이 한 말이 외부 세계의 존재를 증명했다는 주장이다. 무어는 ‘비가 오지만, 비가 오는 것을 믿지 않고’, ‘비가 오지만, 비가 오지 않음을 믿는다.’라는 역설을 제시하였다. ‘비가 온다.’가 사실이고 이 사실에 대한 믿음과 믿지 않음에 결부되는 문장도 참이므로 역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특별한 시점에 비가 오고, 비가 온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면, 그러한 회의주의 믿음은 그런가 보다 하지만, 현재 시제에서 ‘비가 온다. 나는 비가 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면, 그런 말을 하는 자는 이상한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비트겐슈타인도 카페 정원 의자에 앉아있다가 누군가 나무를 가리키며 “이것이 나무인지 안다.”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무어가 주장하는 회의주의 역설을 반박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미치지 않았군. 우리는 오직 철학만을 하고 있다네.” 비트겐슈타인은 이 구절에서 ‘오직’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자기 존재의 언급이 self reference 그 자체로 참으로 검증된다는 점이 알려진다고 할지라도, 이 세계에서 남에게도 확실하게 알려지도록 알려줄 ‘ 경우’는 없다고 비판한다. 일상 생활에서 상식의 질문은 상식의 답변으로 먹히도록 털실로 뜨개질 되었지만, 누구에게라도 알려질 수 있는 외부세계의 확실성은 보증해줄 수 있는 논증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무어의 역설은 ‘내 몸이 존재하며, 나는 결코 지표면을 떠나지 않았다.’라는 전제에서 나왔다. 비트겐슈타인의 ‘경우’도, 미치지 않았다며 사유하는 상황에 단어를 맞추어 집어넣은 기묘함이 있다. 두 철학자를 위하여, 비가 온다거나 눈이 내리는 경우, 그들이 만든 문장은 비인격적 주어로 진리 개념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주어 형식의 문장이 가만 놓여있어도 참이라면, 누구 뭐래도 참이고 참이고 아니면 아니라고 믿으면 되지만, 괜스레 미필적 고의로 독자들에게 외부 세계 존재의 증명 부담을 떠맡겼다는 의구심은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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