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코페르니쿠스 체계 VS 인간의 “이상화된 위치”

record9218 2024. 9. 30.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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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설은 지구는 우주 중심에서 가만있고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이론이다. 이와 반대로 코페르니쿠스 체계는 태양이 가만있고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고 한다. 후자는 지구가 원래 있던 자리에 태양을 스위치 시키면서 태양의 위치를 우주 중심에서 약간 비켜놓았다. 코페르니쿠스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는 지구도 다른 별처럼 한 별이고 자연 운동을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자 중세 대학에는 야단법석이 일어났다. 그동안 천동설 행성 체계를 지지하였던 7 학예 자유 인문학의 분과가 와해 되었기 때문이다. 문법, 수사학, 논리학의 3과목과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의 4과목의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근대 과학이론의 발원에 대하여 화이트헤드나 쿤 같은 학자들은 중세 신학으로부터의 무의식적 도출로 본다. 어떤 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 체계는 후기 중세 유명론 우주론의 개혁 운동의 혜택이라고도 지적한다.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 우주론은 단테가 말하는 아홉 번째 하늘의 끝자락에 놓인 움직이지 않는 원동자를 목적론적으로 정초하였다. 이 체계에서 지상의 영역에 거주하는 인간은 오직 특별한 영향을 통하여서만 천상의 높은 영역의 지식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이 가장 낮은 천구에서 바라보는 지구를 도는 달의 움직임과 동일시되는 활동적 능동지성이다. 이 이성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신적인 기원을 갖는다. 이것이 인간에게 유출로 영향을 주어 우주론에 대한 인간학의 하위 종속을 가져오고, 인간이 천체의 명상을 위하여 이론적 호기심으로 이질적 세계지대의 현상과 마주치게 될 때 실재 세계에서 떠나지 않게 한다.

 

중세가 끝나갈 무렵 후기 르네상스 플라톤주의 인문주의자들은 인간도 하늘에 대한 지식에 근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의 코페르니쿠스 서문도 왜움직이는 지구가 인간중심주의로부터 사주된 우주관보다 더 나은 이유를 완곡하고도 은근하게 설명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는 인간을 위한 목적론의 일반화가 아니라, 천문학의 기술이 인간의 삶에 유용하고 우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조차도 인간에 의한 진리 근접 가능성의 보증을 전제하였다는 것이다. 후기 르네상스의 코페르니쿠스 주의 추종자들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인간중심주의로 변형하므로 세계질서의 동질성을 수용하였다.

 

코페르니쿠스 세계중심에 지구와 인간이 제거되자 구원의 신과 창조의 신이 한 체계에 머물 수 있나? 라는 신앙의 가능성의 물음이 일어났다. 이 물음은 라테란 공회가 요구해온 것으로 철학에서는 참이지만 기독교 신앙에서는 그렇게 볼 수 없다는 이중진리 문제로 대두되어 있었다. 원래부터 이중진리의 논쟁은 구원의 하나님과 창조의 하나님이 양쪽을 다 할 수 있는 절대 능력이 목표이지 세계에 대한 인간지식 확장이 현안이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 천문개혁에서 인간지식의 유용성을 증명하고 체계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그나마 그 자체로 과학이라고 부르는 활동성에서 발원하는 변화의 산물이다. 갈릴레이 물리학과 데카르트 철학은 동질의 물리적 세계로 수학 화하므로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인간 중심적 실재를 존재론적 통일하였다.

 

코페르니쿠스 천문개혁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인간중심주의 목적론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주장은 일체의 모든 사유 전통과 결별을 선언한 근대철학 진영에서 본격화되었다. 근대철학자들은 더 이상 인간중심주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수용하지 않고 근대의 새로운 조짐을 특징짓는 일체의 사유 활동에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혁명적으로 봉사하도록 끌어당겼다. 지구 중심주의가 인간중심주의를 수반하지 않고 거꾸로 인간중심주의가 지구 중심주의를 함축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사라진 우주의 중심에서 인간은 위대함과 연민을 느끼며 스스로 이상화된 위치에서 내 머리 위로 별들이 총총떠 있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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