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3년 6월 22일 로마의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수도원에서 70세의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에 출석하였다. 이곳 광장은 33년 전 부르노가 산채로 나뭇더미에 불태워져 잿더미로 변한 곳이다. 브루노와는 달리 갈릴레이는 아버지 빈센쵸의 아들임을 밝히면서 “지구는 움직이고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론은 틀렸음”을 맹세하였다. 이후 고향 피렌체로 돌아간 갈릴레이는 가택 연금 상태에서 마지막 인생을 보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그까짓 성당 안 나가면 그만이지 뭣 때문에 개고생이냐고 하겠다. 하지만 당시는 가톨릭교회가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결정하였다. 개신교 군주들과 합스부르크 황실과 가톨릭은 국가와 민족의 존망을 걸고 30년간의 종교 전쟁을 치를 정도였다.
갈릴레이의 법정 최후진술은 사실을 왜곡한 철저하게 방어된 위증이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그 자신이 제작한 망원경으로 수집한 경험적 관찰 증거들에 기인한다. 갈릴레이는 1610년 『시데레우스 눈치우스』, 곧 이름하여 “별들의 메신자”라는 의미의 팜플렛에서 망원경으로 들여다본 달은 울퉁불퉁한 산과 계곡으로 덥혀있어서 월상의 천체는 영원불변하지 않다는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은 틀렸다는 점을 알았다. 그는 3달 동안 밤마다 관찰하였던 목성과 주변의 4 별의 형태의 데이터 분석을 통하여 목성도 위성을 갖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다시 망원경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고 태양과 지구와 달의 상대적 위치에서 금성이 이지러지고 자지러지는 모습을 분석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관측 데이터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태양을 제외한 무수한 별들과 행성들은 영락없이 태양 중심으로 도는 모습이 나왔다. 갈릴레이는 기쁜 나머지 자신의 발견을 케플러에게 암호로 이놈이 달의 차고 기우는 모습을 닮고 있다고 편지를 보냈다. 1613년 3월에는 태양 흑점을 발견하자 태양은 자신의 축에서 돌면서 다른 행성들을 돌리든가 할 것이고 얼버무리면서 지구는 움직이고 태양은 정지해있다는 점을 기정 사실로 확정하고 있었다.
종교 재판의 첫 번째 소송의 발단은 1616년에 여호수아 10장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는 구절에서 불붙었다. 갈릴레이는 이 구절에서 여호수아의 명령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잠시나마 지구 운동을 멈추게 할지라도 결과는 동일할 것이라고 응수하였다. 벨라민 추기경을 통하여 피렌체로 소식이 들어갔다. 행성 운동 체계는 가설 정도의 선상으로 끝내고 신학에서 손을 떼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충고였다. 우르반 8세의 지시가 내려진 가운데 1616년 2월 23일과 24일에 11명의 신학위원회 신학자들은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는지, 지구가 세계의 중심이 아니고 움직이지 않는지에 대하여 검토에 들어갔다. 종교재판관들은 갈릴레이 주장은 엉터리이고 철학에서 불합리한 것이라고 판정하였다.
이후 갈릴레이는 7년간의 침묵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브라헤의 이론을 지지하는 세력이 코페르니쿠스 태양 중심 체계에 반기를 들자 묘한 분위가 연출되었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진영에서 나머지 공부를 하던 자들로 새로운 학설을 어설프게 공격하자 갈릴레이는 그들의 무지한 내막을 반박할 필요성을 느껴서 『‘두 세계 체계의 대화』를 집필하였다. 이 책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동설 세계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체계 사이의 경계를 분명하게 그으면서, 그 동안 갈릴레이 자신이 주장해온 지동설의 대중적 파급 효과를 누르기 어려운 정황으로 접어들었다. 갈릴레이의 두 번째 소송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갈릴레이에게는 ‘아마도 지구가 돌겠지’하는 추측이 아니라 운동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진리였다. 세계중 심에서 지구 운동을 따르려면 저울 중심에 오성을 붙잡고 세계 사건의 중심에서 두 세계 체계의 양자 택일로 결판을 내려야 한다.
1633년 4월의 4차례의 청문회에서 갈릴레이는 자신을 속이고 속였다. 1633년 6월 22일 10명의 추기경 재판관이 참석하여 7명이 서명하고 3명은 공란으로 남겨둔 가운데, 갈릴레이는 무릎을 꿇고 성경에 손을 얹고 틀린 이론을 대변하지도 않을 것이고 방어하지도 않을 것이며, 말로도 글로도 가르치지 않을 것이라는 맹세를 서약하였다.
루터는 애초 코페르니쿠스 주의에 대하여 “여호수아는 태양을 정지하라고 명령하였지 지구는 아니었다.”라는 거들었다. 이는 개신교가 지동설에 관대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진술을 뜯어보면 여호수아 명령으로 태양이 정지하므로 오히려 지동설이 입증되게 되어있다. 볼테르는 이 세기의 사건을 다음의 스토리에서 희화화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로마에서 도미니칸 수도사와 영국 철학자가 만났는데 똑같은 토론을 벌였다. 수도사는 철학자에게 당신은 지구운동을 가르친다는데 어째서 여호수아가 태양을 정지상태에 있으라고 한 명령을 잊고 돌아다니느냐고 힐책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철학자는 곧바로 당신이 말하는 그 순간부터 태양은 사실상 정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사 자신의 논증으로부터 지구운동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냐고 맞받아쳤다.
스피노자도 갈릴레이가 가톨릭으로부터 정죄당한 것과 같이, 23살의 젊은 나이에 유대교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그는 신즉 자연이라고 생각하였고 만물에 신이 있다는 범신론 때문에 불경과 신성모독의 죄를 짊어졌다. 척교 문서는, “이자는 낮에도 밤에도 누었을 때도 나갈 때도 들어올 때도 저주를 받을 것이며, 주님은 이자의 이름을 하늘 아래 파괴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스피노자는 장소 이동을 부정한 제논의 이야기를 통하여 여호수아가 태양을 움직이지 말라고 말하는 명령에 모종의 암시를 준다. 그에 따르면, 디오게네스가 제논의 강의실을 일부러 들락날락하면서 수강생들을 성가시게 만들었다. 한 수강생이 디오게네스를 노려보고 있다가 그를 꼼짝달싹 못하게 꽉 붙들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 자네는 스승의 이론을 거역하려 든단 말인가?” 제논은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장소 이동을 부정하므로 운동을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보기에는 감각이 오성에 반대되는 운동을 증명하지 못하므로 장소이동을 부정하는 주장에 속이고 속는 일이 벌어진다. 정신이 오성의 도움으로 사태를 파악하는 곳에는 기만이 생기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갈릴레이는 1637년 겨울 아르체트리에서 양 눈을 완전히 실명하자, “내가 이전에 관측하였던 공간의 크기는 내 몸의 크기로 줄어들었구나!”라고 술회하였다.
무엇보다 코페르니쿠스 태양 중심 세계상의 등장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곳은 지옥문을 지키던 보초가 천국의 파수꾼과 해야 하는 업무교대 장소였다. 바로 그 자리가 순식간에 뒤죽박죽이 된다는 이야기는 곧장 소설이 되었다. 1638년 여름, 영국에서 30세의 늠름한 청년 밀턴이 종교 재판으로 수감 중인 77세 고령의 갈릴레이를 찾아와서 약삭빠르게도 대화를 나누고 돌아갔다. 그 후 밀턴도 스스로 완전히 실명한 상태에서 대천사의 반란을 다룬 이야기를 구술하고 비서로 하여금 적게 하여『실락원』을 완성하였다. 단테가 베아트리체와 함께 지고한 하늘의 사랑으로 가꾸어 놓은『신곡』은 쑥대밭이 되었다. 조선에서는 무엇인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들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김만중이 몽상적이나마 주인공이 팔선녀를 만나는『구운몽』으로 단테를 천국으로 입국시킨『신곡』의 3 성녀의 이야기와『실락원』의 황량해진 반역의 이야기를 위로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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