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마르부르크 대학 여름 학기-
1925년 여름 학기 마르부르크 대학 하이데거 세미나에서 가다머는 ‘최초의 인간이 고개를 들었을 때, 세계가 거기 있었다.’라고 메모하였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는 최초의 인간이 누구를 지칭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마르부르크 대학 교수진으로는 불트만, 하르트만, 폴 틸리히, 나트로프 등이 포진하였고, 학생들로는 가다머, 아렌트, 뢰비트. 슈트라우스, 클라린, 안더스, 요나스 등이 군집하고 있었다. 독일의 남부 지역은 신 칸트학파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전통 철학의 시각은 후설, 야스퍼스와 더불어 하이데거를 열외로 보았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조교로 시작하여 마르부르크 대학교수가 되었고 대학 개혁 운동에 참여하고 있어서 반동으로 찍혀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독일대학은 교수가 세미나에서 가르친 내용을 학생이 숙고한 내용과 비교하고 토론하고 평가하면서 학문적 담론을 형성한다. 하이데거가 가르친 교육 방법은 2000년 이상 내려오는 철학에서 학생 스스로 텍스트의 의미와 철두철미하게 씨름하면서 뜻을 찾아가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박사학위는 세미나나 콜로키움의 교수의 가르침에서 득 得 하여 허용된 주제를 논문으로 제출한 다음 구술시험을 통과한 자에게 발부 發付되는 서식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세미나에 참석하는 학생들은 텍스트 내외의 해석학적 상황에서 교수가 하는 언사나 표현 그리고 거동 하나하나가 초미의 관심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가다머는 지칭한 첫 인간이 탈레스인지 아담인지를 두고 수군거리는 가운데 ‘아직 많이 진전한 모양은 아닌 듯하다’라고 덧붙였다. 수강생들은 여름 학기 내내 표현된 언사들에 대한 의미 채굴을 진행하였다. 현존재의 존재 이해가 철학적 주인공 혹은 신학적 주인공으로 보아야 할지의 여부, 그리고 이를 인간학적 사태 혹은 철학적 사태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닌지를 여부, 등등이다. 즉, 세미나에서 씨름하는 존재자의 주인공이 인간의 역사에 속한 것이지 혹은 철학의 역사에 속한 것인지의 문제다.
세월이 지나고 난 후의 존재 역사의 빛에서 보면, 존재와 현존재의 전경 前景으로 튀어나온 어떤 존재자에 대한 논쟁의 끝은 의외로 바티칸의 천당벽화에 아로새겨있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천당 벽화에서 하나님이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껴안고 고개를 든 아담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의 모습에서 유예된 진실을 읽었다. 아담의 시선은 별들이 없는 천국에 돌고 도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눈초리로 묻어난다.
천체 관측자는 무엇을 보고 어떻게 자빠졌나? 탈레스는 우물로 추락하였고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했다. 둘 다 철학과 신학에서 몰락하였다. 당시 북부 독일의 논리 철학 진영으로 예나대학의 프레게는 천체 관측자가 보는 대상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하였다. 그는 ‘케플러가 ( )을 본다’라고 했을 때 괄호 안에 (새벽 별)과 (저녁별)을 집어넣으면, 이 문장의 의미와 지시를 완벽하게 분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빈 괄호에 들어갈 대상이 같다는 점을 확정할 수 있다면 가다머가 지칭하였던 ‘거기 있었던 자’가 누구를 지칭하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요즘 보자면, 존재자의 몰락이라는 직접적 귀결이 존재의 감춤과 드러남 그리고 소유의 은닉으로 사라지므로, 존재로부터 존재자에게 주는 졸업 사증 査證 교부는 탈레스의 역사적 운명을 교양 과목으로 학습하므로 달성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자가 당하는 존재의 숙명을 존재 망각으로 감지하면서 1927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존재와 시간』을 출간하고 후설의 후임으로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대학을 옮긴다.
1969년 하이데거의 80주년 탄생 기념 강연에서 트라키아 여인으로 자처하고 고개를 쳐든 여인이 등장하였다. 그녀는 자신을 독일 여자 농부로 빗대며, - 독일 여자 농부는 억세게 힘이 좋다 - , ‘너 마르틴도 잠시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히틀러와 걸어갔을 때, 나 역시 마음속에 묻어놓은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해야 하겠다.’라며 운을 뗐다. 라디오 방송에서 ‘당신’이라는 존칭 대신 ‘너’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그녀의 미투 운동은 둘 사이가 보통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녀는 이날 토론에서 1925년 그녀가 다녔던 마르부르크 대학 시절로 소급하여 올라가서 존재의 원 사건에서 놀아났던 존재와 현존재의 역사를 곱씹으며 그녀 자신을 재해석하였다. 그녀에 따르면, 인간은 적나라한 사실로서 누구나 태를 끊고 나온 순간부터 건국 建國에 참여할 수 있다. 말하자면 미켈란젤로의「천지창조」의 아담의 시선을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탄생은 그처럼 중요한 일이었는데, 그녀의 동료 요나스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라도 ‘첫날밤과 첫날 아침’이 지난 이후에 태를 끓고 나올 수도 있는 미래 생명의 책임에 대하여 말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고 보면 이 두 명의 유대인 철학자는 그들의 스승인 하이데거에게 공동으로 존재자들의 옛일을 철학적 성찰 대상으로 올려놓고 논쟁하고 있었다.
당시 17세의 아렌트는 하노버 출신으로 철학으로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1924년 사유를 배우러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왔다. 그녀는 하이데거의 강의에서 “태어났고, 일했고 죽었다”라고 말하는 한 철학자의 인격의 간결한 요약에 감명을 받았다. 35세의 혈기왕성한 젊은 철학 교수 하이데거는 아렌트에게 며칠 후에 목표에 도달할 요량으로 편지를 띄운다. “친애하는 아렌트 양. 나는 오늘 저녁 당신에게 가야 하고 당신의 가슴에 말할 것이 있습니다.”라고 애틋한 글을 보냈다. 그 후 두 사람 사이에는 호텔 주소, 연구실, 소등 시간이 중차대한 정보로 오고 갔다. 여대생이 대학 건물 연구동에서 어딘지를 몰라 서 있을 때, 수위가 다가와서 하이데거의 이름을 말했을 때 가슴이 멎었고, 첫날밤, 다음은 어디고, 어느 때인지 등등, 마르부르크 대학가에는 알듯 모르듯 오묘한 사랑의 세레나데가 울려 퍼져나갔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 사람은 실존철학의 존재 Being과 실존Existence의 실천적 의미를 잘 모른다. 하이데거는 미리 정한 시간과 장소의 랑데부에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실존철학 프로젝트를 실행하였다. 철학을 그렇게 실습하였다. 아렌트는 감추지 않고 드러냄에 있는 하이데거의 진리 개념과 함께 헤어져야 하였다. 더 이상 마르부르크에서 진리의 장소, 진술, 사태와 판단의 일치를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1926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후설을 거쳐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야스퍼스에게 갔다. 아렌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나름대로 여러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의 친구들과 접촉하며 대학 생활의 낭만을 즐겼다. 아렌트는 요나스가 마련한 식사초대로 넥카강이 내려다보는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을 걸어가며 독일 시온주의 연맹 회장이던 블루멘펠트와 어깨동무하고 노래하고 춤추며 교태를 부렸다. 이 철학자의 길은 오늘날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네카강을 낀 언덕길에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요나스는 이들을 보며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그녀는 옷을 단순하게 입었고 치장도 하지 않았고 특별히 "예쁘지도 아름다운“ 축에 속하지도 않았다. 그녀와 관계를 맺은 독문학 전공 학생 베노 폰 비제는 결혼까지도 생각하였지만 감당하지 못할 같아서 그만두었다 한다.
아렌트는 1928년 거의 8학기 만에 22세로 야스퍼스에게서『아우구스티누스에서 사랑의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야스퍼스가 정신병리학에서 23세, 하이데거가 철학에서 24세, 후설이 수학에서 34세에 박사학위를 한 것과 비교하면 엄청 빨랐다. 그녀의 첫 남편 균터 안더스가 후설에서 21세에 박사학위를 받은 것에 비하면 약간 늦었다. 그녀는 하이데거의 개념 성의 기초에서 가까운 이웃 사랑과 신의 사랑을 기술하고, 경험적 반성에 의한 신체적 사랑을 방어하였다. 하이데거는“세계는 더 이상 나의 세계도 너의 세계도 아닌, 우리의 세계가 되었다. 우리가 하고 해낸 것은 너에게 그리고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속한다. 아렌트는 나의 『존재와 시간』의 영감이었다.”라고 적었다. 하이데거는 자신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존재와 시간』이 그녀와의 사랑의 흔적이라고 하므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가정을 지키면서 아렌트에게 할 만큼 하였다. 아렌트도 “내가 너를 향한 내 사랑을 잃어버렸을 것이라면, 살 권리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공부도 안 하고 땡땡이쳤다면, 이 사랑과 그의 실재를 잃어버렸을 것이다.”라고 응수한다. 독자는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세계가 그들의 것이 되었더라도 반반의 세계인지 진리도 반반인지, 각각 그들의 사상 세계의 몫으로 돌아가는 관계를 냉정하게 판단하여야 한다.
아렌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1929년 균터 안더스와 결혼과 동시에 베를린으로 떠난다. 그녀는 베를린에서 라헬 연구로 교수 구직 논문을 준비하지만 되지 못하였고 남편 역시 아도르노에서 퇴짜 맞았다. 그녀는 1937년 유대인 활동과 관련되어 게슈타포에 붙잡혔다가 풀려나오면서 파리로 도망친다. 아렌트는 파리에서 안더스와 이혼하고 공산주의자 전력이 있는 하인리히 뷜러와 재혼하면서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미국으로 간 아렌트는 1953년 처음으로 뉴욕의 칼리지 교수가 된 다음 프린스턴 대학, 시카고 대학, 등에서 교수가 되었다. 그녀는 1951년『전체주의의 기원』을 썼고 1961년『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 전범 재판 보고서로 세계적인 여성 정치철학자의 명성을 얻었다.
하이데거는 1962년 『사물은 무엇인가』에서 철학에서 허용된 자들이 한번 빠졌던 우물의 심연을 구성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철학적 위험지대에서 발생하는 오프사이드라고 호루라기를 분다. 한번은 시궁창에 빠져있었던 시절을 이따금 기억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사건 존재론적으로 언젠가 우리 스스로 존재자였다는 점을 자각한다면 우리는‘존재론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좋다고 실토하였다. 실제로 독일과 미국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하이데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확실하고 가장 시끄럽게 웃음거리를 들어야 하는 곳에서, 진짜 하녀는 웃을만하다고 보았지만 정작 철학의 비조 탈레스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에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아렌트를 비롯한 그녀의 동료, 마르쿠제, 뢰비트, 요나스, 안더스 등 유대인 제자들은 히틀러 나치에 동조하였는지, 아렌트를 위하여서는 사랑을 했으면 배반한 것은 아닌지, 등 하이데거의 자기 비판적 소리를 들으려고 몰려갔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1925년 마르부르크 대학의 여름 학기에 벌어진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사랑 이야기는 1920년대 쉘러와 더불어 태동한 플레스너의 철학적 인간학을 도입하여 탈 우주 중심 위치에서 그들의 사태에 대해 웃어볼 필요가 있다. 2000년 이상 전해오는 탈레스의 우물 추락을 우주의 탈 중심 위치에서 바라보면 주어는 신체 가까이서 먼 대상을 지각한다. 관찰하는 주어와 대상의 거리와 위치 관계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주어는 먼 대상을 확실히 하려고 하거나 혹은 가당치 않을 때도 웃는다. 화살이 시위를 떠나 목표에 진입할 때 초점을 사유하는 자, 곧, 철학자는 마지막에 촉이 밀고 들어갔거나 빗나갔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테오리아에 머문다. 말대로 테오리아, 곧 이론은 보지 못하는 어떤 것이지만, 그 자리에 트라키아 하녀가 들어서도 좋다. 화살이 박힌 곳에는 밀침(ver-rueckt)과 빗나감(en-trueckt)의 두 가지 전망이 철학자와 하녀다. 무엇이 현실이냐고 물었을 때, 철학자는 위를 보다가 자빠졌고 하녀는 아래를 보다 웃었다. 철학자가 밀치고 들어가자 그녀는 자신이 속한 생활세계에 빗나갔기 때문에 웃었다.
『트라키아 여자의 웃음』에서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애정 행각의 흔적을 처음으로 철학사적 반성과 은유로 조명한 블루멘베르크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솔직하게 존재로서 존재자 역사에 트라키아 여자의 웃음을 끌어들여, 플라톤의 위를 향한 안목을 반대로 돌려놓고 싶었지만, 출구를 상실한 당혹감으로『존재와 시간』에 머물다가 소크라테스 이전 사유로 돌아갔다. 그는 하나의 몰락만이 있는 경우 그녀 자신도 웃고 그녀 스스로 몰락을 믿게 하는 것은 좋지만, 입만 다물고 있어도 2등은 하는 주제넘은 하녀들에게 철퇴를 가하는 것이 좋았을 것으로 보았다.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무無 이해理解의 사람에게 전문적 재미를 붙여주려고 현상학의 창립 발기인과 해석학의 주창자를 동원하려는 노력은 필요 이상의 형이상학적 비용을 치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불르멘베르크가 쓴『트라키아 여자의 웃음』의 독자와 같이, 별을 연구하려고 위를 쳐다보다가 아래의 것을 볼 수 없어서 우물에 빠졌던 심연을 껑충 뛰거나 건너뛰는 위험천만한 위험지대에 놓인 서양철학사를 읽어내는 독자는 칭찬받아야 한다.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릴레이의 위증과 『신곡』의 쑥대밭 (1) | 2024.09.29 |
---|---|
「아테네 학당」의 새로운 읽기 (2) | 2024.09.28 |
해리고지의 사랑 (0) | 2024.09.23 |
마르크스의 감각과 계급 투쟁 (1) | 2024.09.20 |
루체른의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부고 (7) | 2024.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