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마르크스의 감각과 계급 투쟁

record9218 2024. 9. 2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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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을 집필중인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파리 망명 시절에 프랑크푸르트 민의원 출신인 민주주의 좌파 루게와 같이 발행한 1844프랑스-독일 연감에서 헤겔 법철학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헤겔 좌파라고 밝힌다. 1867자본론1권의 뒷말에서 자신은 헤겔의 신비적 껍질 속에서 합리적 핵심을 발견하기 위해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뒤집고 싶다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이렇게까지 자신에서 헤겔을 내치지 못한 까닭은 그만큼 헤겔과의 사상적 결별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헤겔을 좌우와 중도파로 나누는 것은 슈트라우스가 예수의 생애을 출간하면서 분류한 헤겔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헤겔 철학의 최전선에는 언제나 종교 철학이 놓여있었기 때문에 헤겔 우파는 헤겔을 기독교 철학의 완성자로 보았다. 반면에 헤겔 좌파는 변증법적 무신론 입장에 서서 국가의 폐지 내지 죽음을 요구하였다.

 

마르크스는 1835년 본 대학에서 법학과 카메라 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이듬해에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서 헤겔 제자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헤겔학파에 들어섰다. 그는 1839년 소수의 수강생만이 있는 바우어의 발밑에 앉아 이사야강의를 들었다. 바우어는 학부 시절 칸트의 미학 논문으로 헤겔로부터 학부생 상을 수여한 경력으로 183424세에 박사 학위와 함께 강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마르크스는 강의가 끝나면서 뜬구름 잡는 철학도들과 함께 뒷풀이 장소로 향하곤 했다. 학업을 막 마친 청년들은 먹고 마시고 열띤 토론으로 벌이기 위해 베를린시를 통과하는 스프레 강과 루멜부르거 호수 사이의 곶에 있는 스트라우의 선술집 정원으로 모여들었다. 이곳은 유럽에서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는 시기에 소외된 실업자 지식인들이 모이는 아지트로 닥터스 클럽 Doctor’s Club이었다. 마르크스는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청년 헤겔주의자 모임에 합류하면서 포이에르바하, 바우어와 더불어 헤겔 좌파 인물로 찍혔다.

 

마르크스는 184143023세로 베를린 대학 졸업증을 받기 전 예나대학에서 415일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직접 예나대학에 출석함이 없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46일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원전이 소실되어 마르크스 생전에는 출간되지 않았다. 1927년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 11권에 이 논문이 실리므로 마르크스가 어떻게 철학박사가 되었는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마르크스가 이 논문에서 고대 유물론 철학자들을 취급하였는데 이상주의나 유물론과는 무관하고 마르크스의 후기 저작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평가도 있다. 그렇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마르크스는 이 논문에서 자신이 전개하였던 유물론의 핵심적인 특이성과 방향을 제시하였다.

 

마르크스는 서문에서 자신은 2000년 이상 내려온 서양 고대 철학의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거창하게 떠벌린다. 한 문장을 한 페이지 이상 길게 늘어놓고 단순한 사실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도 헤겔의 글쓰기 스타일이다. 21세 청년은 고대 유물론자의 에피쿠로스 원자에서 인간의 자율적인 신성한 자의식을 끌어내고 헤겔의 로고스를 뒤집어 그의 머리를 인간 자의식의 발바닥에 뭉기겠다고 선언한다. 그의 의중은 바우어의 자의식을 교두보로 삼고 신학적 양면성을 지닌 헤겔의 절대정신을 밀어내므로 역사를 추동하는 힘을 인간의 자의식으로 대치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계급투쟁 이론의 시발점이었다.

 

마르크스는 유명한 고대 두 명의 유물론자들이 사사건건 반대 입장에서 의견 충돌을 벌였던 점을 예의주시하였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에 선형 운동과 충돌만 허용하나, 에피쿠로스는 직선에서 벗어나 임의의 편차를 취하는 세 번째 운동을 강조한다. 데모크리토스는 현상 세계에서 가설로만 원자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반면, 에피쿠로스는 원자의 다양한 크기, 모양 및 중력 등의 가시적 현실을 곁눈질만 하며 모르쇠 한다. 데모크리토스는 감각 세계를 주관적 모양 模樣으로 만드나, 에피쿠로스는 객관적 모양으로 삼는다. 데모크리토스는 필연을 사용하나, 에피쿠로스는 우연을 사용한다. 데모크리토스는 회의론자 경험주의자고 에피쿠로스는 독단주의자다.

 

따지고 보면,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 원자론을 대출받아 그의 유물론에 자기만의 쾌락주의의 정원을 꾸몄다. 데모크리토스의 세계에는 원자와 진공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무한 공간의 영원한 낙하 운동만 있다. 모든 것은 원자의 크기 숫자 형상의 결합과 분리에서 필연적이며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없다. 큰 것이 더 작은 것보다 빨리 떨어지는데 다만 측면 운동과 소용돌이가 있는 곳에 우연의 여지가 있다. 에피쿠로스는 이곳에 우연을 삽입하여, 원자가 두께와 충격으로 작용할 때, 섬세하고 매끈하고 둥근 원자에서 영혼을 끄집어낸다. 불의 원자는 가장 빨라서 운동을 통해 전체 물체로 뚫고 들어간다.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 원자에 에피쿠로스의 감각 지각을 대입하여 비교하고 양자의 간격에 시간을 대응시켰다. 원자는 크기나 형태가 따로 없지만, 상상의 영역에 놓이면 감각적으로 무거워진다. 원자의 크기와 형태에는 따로국밥이 없다. 하지만, 일단 생각 밖으로 나가면 시간과 더불어 무거워진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카메라를 도입하여 무수하게 쌓아놓은 원자의 정적 이미지를 시간의 계기에 따라 운동으로 포착한다. 감각 지각의 추상적 형태는 특별히 존재하는 자연에 고정되어있지만, 시간은 현상 자체를 반영하기 때문에 가시화할 수 있는 상품이 생긴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관능은 시간을 구체화한 것으로 감각 세계는 그 자체로 시간을 반영한다고 여긴다. 마르크스의 말을 들어보자.

 

몸이 멸망하는 것은 바로 신체가 감각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끊임없이 몸에서 분리되어 감각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관능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는 또 다른 본성이다. 관능이 개인적 자의식의 자연적 형태일 뿐인 것처럼, 감각적 자연도 단지 객관화된 경험적 개인적 자의식일 뿐이다. 감각은 원자 세계의 추상적 이성과 마찬가지로 구체적 자연의 유일한 기준이다.”

 

에피쿠로스 쾌락주의는 결국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수립한 물리학의 전통을 거부하고 세계는 영원무궁하다면서 이생을 추구하며 저승도 생각할 수 있을 지경에 이르렀다. 에피쿠로스 쾌락주의는, -즉 이 쾌락 혹은 저 쾌락- 하나가 다른 하나 보다 더 나쁜 것으로 입증되지 않으면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관측과 일치하는 현상으로 현실을 종결짓는다. 마르크스는 두 개의 다른 이론이 가능하게 되자 에피쿠로스 쾌락주의에 철퇴를 가한다. 에피쿠로스에게 천체의 영원성은 자의식의 아타락시아인 영혼의 평화를 방해하기 때문에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필연적이고 엄격한 결과다. 영혼의 평화를 의미하는 아타락시아는 괴롭힘이나 방해의 부재나 부정으로 도달하는 평정심으로 번역된다. 고대 그리스 전투에서 군인이 지녀야 하는 이상적인 정신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마르크스는 추상적 자의식의 자연적 형태에 지나지 않은 원자에 대해 객관화된 경험적 자의식을 나타내는 감각적 자연을 통해 얻는 자신감으로 자신의 이론적 탈출구를 마련한다. 이 자신감은 상상의 중력처럼 중력의 가장 높은 현실인 천체 안에서 원자의 발전을 이루는 형태와 물질, 개념과 존재 사이의 모든 이율 배반을 해결하고, 그 안에서 필요한 모든 결정을 실현한다. 그곳에서 천체는 현실이 된 원자로 거듭난다.

 

마르크스는 달라진 원자 이론의 방법으로 에피쿠로스 범주를 붕괴시킨 다음 두 고대 유물론 체계에 대한 가장 깊은 깨달음이자 심오한 결과를 예비한다. 물질이 천체 계에서 그 자체로 형태를 받아들여 독립성을 획득한 시점부터 그의 형태는 현상 세계와 마찬가지로 원자 세계에서도 투쟁한다. 물질의 하나의 모양의 결정이 다른 결정을 상쇄하고 추상적 개인적 자의식이 자신의 본성을 객관화할 때 추상적 물질과 싸운 추상적 형태에는 그 자체로 모순이 나타난다. 물질은 모양을 갖춘 형태와 화해하여 독립하고 자의식은 번데기에서 나와 자연에서 독립한다.

 

헤겔의 자의식은 로고스에 대한 자기 지식이고 자율적이지 않으나, 바우어의 자의식은 헤겔의 신성한 로고스에 대한 신성한 인간 자의식이다. 마르크스는 바우어의 인간 자의식을 하늘과 땅의 하나님들에 대항하는 최고의 하나님으로 올린 다음 그의 주위에 아무도 있지 못하게 하였다. 마르크스는 1844년 엥겔스와 함께 나사렛 예수와 그의 모친 마리아, 양아버지 요셉만을 지칭하였던 성 가족을 넘어서 자신을 비롯해 다수의 성인 St.’들을 등장시킨성 가족에서 집중적으로 바우어를 조롱하였다. 그들은 4년 후 공산당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사슬 외에는 잃을 것이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승리할 세상이 있습니다.”라고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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