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인간의 나르시스 징후와 직립 보행

record9218 2024. 9. 18.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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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는 인간이 전체 우주 가운데 일종의 나르시스 징후로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한 존재임을 알아차려 버리므로 인류에게 회 까닥하는 모욕감을 가져다주었다고 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미소년이 숲속의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자신을 사랑하다가 결국은 쪽팔리게 되어 창피해진 감정을 그렇게 분석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를 우주의 변방으로 놓고 세계중심에서 더할 나위 없이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위치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한갓 떠돌이별로 전락한 지구에서 황량하기 그지없는 정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파스칼은 프로이트와 같은 모욕적 감정이 없이도 새롭게 생겨난 공간에 대하여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두렵게 한다고 했다.

 

일찍부터 신라의 고승 원효는 누가 나에게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겠다(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이라며 우주 간격을 넉넉하게 벌려놓는 포스트 모던적 생각을 하였다. 공간적 거리의 이동을 표현하는 독일어에는 어긋나고 밀려나 이동하다는 의미를 갖는 페어륙켄verrücken이라는 동사가 있다. 이 동사의 형용사형 페어륙크트verrückt미친 상태이며 명사형 페어륙크테verrückte미친 자를 지칭한다. 가령, 이태원 같은 좁은 골목길에서 몰려다니거나 밀려다니다가 밀린 경우나, 원래 위치하는 곳에서 다른 곳으로 밀려나는 이동사태에 그러한 경우가 발생한다.

 

하이데거는 1935/36사물의 본질이라는 강의에서 형이상학의 근본 물음으로 인류의 최초 철학자 탈레스의 우물 추락 사건을 거론하였다. 탈레스의 우물 추락 사건이란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던 천문학자가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몰라 그만 시궁창에 빠졌고 그 이야기를 들은 트라키아 출신의 하녀가 웃었다는 일화에서 유래한다. 하이데거가 탈레스의 자빠짐을 거론한 까닭은 발밑에 무엇이 놓여있는지를 몰라 추락하므로 명증성의 지반을 상실한 철학적 사유의 운명을 걸머지고 시를 쓰는 사유의 길에 도전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탈레스의 우물 추락은 철학적 사유의 추락과 같고 철학적 사유란 우물에 빠질 특별한 위험에 놓인 선행 과정과 같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처럼 보자면, 철학적 사유란 본래부터 인간 본질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일이며 하녀가 필연적으로 웃는 사유다. 원효에서 보자면, 도끼에 자루가 빠져서 끼우긴 끼워야 제대로 도끼가 작동을 하는데 어쩔 줄 모르게 되었기 때문에 그 난리를 피우게 된 것이다. 사유하는 자가 세계에서 밀려나서 사실이 어디에 놓여있는지 모르고 어디에 제자리가 놓여있는지 헷갈려 하였을 때 그녀는 고소하다고 웃고 있었다. 철학은 분명히 그곳에 있었다.

 

하이데거는 바닥이 없는 심연의 사유에서 삶의 바닥, 존재의 바닥으로 넘어가는 현상을 충족이유율에서 찾았다. ‘만사에는 그 나름대로 다르지 않고 이렇게 이 세계에 있을충족 이유가 있다는 이 세계의 존재이유를 처음으로 말했던 철학자는 라이프니츠다. 장미는 누가 보는지 상관없이 아름답게 피어난다. 장미가 누구 뭐라고 하지 않아도 제 스스로 꽃망울을 피우듯이, 현존재의 존재 근거에서도 열림과 선험을 향한 적극적인 근본 체험이 나온다. 바닥에 자빠진 철학자는 세계 안에서 밀침으로 미침이 일어나 미친 가운데 한동안은 밑바닥을 내려다본다. 세월호의 사건이나 천안함의 사고로 억울하게 생명을 잃은 희생자나 생존자들도 그들이 처한 장소의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실재의 미친의미의 전도를 보았을 것이다. 현실에 일어난 사건 사고를 철학자와 철학을 빗대어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읽자면, 철학자는 자빠져 끊임없는 탈 위치성의 장소 이동에 의한 거리 두기를 하였고, 철학은 비웃는 상황의 거리 사태를 측정하였다.

 

탈레스의 우물 추락 사건에서 테오리아에 연관이 되는 관찰자는 명약관화하게 아는 자다. 관찰자가 겨냥하여 맞추려는 진술의 대상에는 삶과 죽음의 현상이 맞부딪친다. 이야기하려는 진술의 목표는 거기기 자체를 사사건건 드러내자는 것이 아니라 죽을 맛을 보여주는데 있다. 본질적인 존재와 가상,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진리와 비 진리의 두 체험 영역 사이에 죽을 뻔 했을 미침이 함께하였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죽을 뻔 했어라는 말처럼 쉬운 말은 없다. 어쨌든 철학자가 자빠진 사고에 대한 사유는 칭찬을 받지 못한다. 먼 곳을 보면서 가까이에 무엇이 있는지를 놓쳤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철학은 본래부터 아무것도 아니며 어떤 것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더군다나 헤겔에서도 철학은 현실 과정을 완성하고 사유가 할 일이 끝난 현실에 아주 늦게 나타난다. 헤겔과 하이데거에서 철학자를 보자면, 철학자는 별을 관측하다가 자빠져 우물에 빠졌으므로, 사실 철학이 있는 곳은 험악한 돌풍을 벗어난 거의 확실한 곳이다. 이미 사유가 끝난 곳이므로 푸코는 그곳을 범죄자 조회가 일어나는 곳으로 지칭했고 케에르케고르는 이를 아이러니로 대신하였다.

 

철학적 인간학을 창시한 플러스너는 인간은 자기보존 설비의 결여로 광물이나 식물같이 생물학적인 특수 환경에 고정되어있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을 자기보존 설비의 결여이며 세계를 향하여 개방성을 표시하는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인간은 탈 중심성의 유기체 자기의식으로 주어와 대상 사이의 상호주관성을 표현한다. 주어는 관찰하는 몸의 외부에서 대상으로부터 떨어진 곳을 관찰하고 그곳으로부터 스스로 관찰되는 지각 관계를 외부전망이 좋은 지점에서 유지한다. 주어로서 인간은 우주 중심의 관찰자로 특권화 된 위치에 있지만 만물 가운데 순수한 특별한 경우가 아니어서 현실에서 떼놓은 특수 단면에 처할 경우 몸을 가누지 못해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는다. 웃음이 몸과 영혼 사이의 존재의 어쩔 도리가 없음을 표시하고 우리를 엄습하고 우리 위치를 잃도록 만든다. 웃음은 긴장해소를 위한 신체적 반작용이며 은유적으로 김이 쏙 들어가고 쏙 빠져나가는 증기기관이다.

 

불르멘베르크는 지표면에 90도 수평에서 직립 보행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주목하였다. 인간은 직립보행에서 오감으로도 지각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공간을 확보한다. 인체의 감기 기관은 땅바닥으로부터 감각 지평을 넘어있지만, 직립 보행으로 말미암아 마치 중력 법칙과도 같은 원격작용을 한다. 미지의 공간을 확보하며 걸어가는 인간의 직립보행은 아주 멀리 떨어진 거리로부터 위협을 당하거나 죽을 수도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현실의 안전 보장을 위한 의식 공간과 놀이 공간을 확보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결여된 것을 자신의 세계에서 친숙하게 만들 줄 알며, 목적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피조물이며 보상받는 행동을 할 줄 아는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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