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는 1875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 시인이다. 그는 1895년에 48편의 시를 모아 시집을 내고 문단에 등단했다. 그는 같은 해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양친의 희망에 따라 프라하 대학에서 철학, 문학, 예술사 외에 법학을 공부하였다. 프라하도 아름다운 대학 도시지만 그는 1896년 가을학기에 새로운 분위기를 지닌 뮌헨대학으로 옮겼다. 세기말의 뮌헨은 독일 바이에른 주의 수도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와 상징주의 예술 활동의 중심지였다.
릴케는 대학 초년생에 적합한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1897년 5월에 브리넨스트라세 48번지로 이사하였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릴케가 이사한 거리는 예술가와 작가 모임이 교류하는 셀링스트라세 83-89번지와 가깝다. 살로메가 1897년 4월 말에 친구 프리다 폰 뷜로브를 만나러 뮌헨으로 내려왔다. 살로메는 레와 헤어지고 안드레아스와 결혼한 이후 니체를 모델로 쓴 소설로 유명해져서 베를린에서 필명을 날리는 중견 작가가 되어 있었다.
릴케는 1897년 5월에 소설가 야곱 바서만의 아파트에서 프리다 폰 뷜로브와 살로메를 만난다. 당시 바서만은 영국정원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자르강 남쪽의 보겐하우젠에 살았다. 21세의 릴케가 15세가 많은 살로메를 만나게 되는 모티브는 그녀가 1896년 4월에 「독일 리뷰」에서 썼던 예수에 대한 기사 때문이었다.
살로메는 예수는 모세의 약속을 저승에서 달성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공포의 죽음을 맞이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약속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첫 번째 유대인 순교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나름대로 포이에르바흐, 레, 니체의 사상을 공부한 다음 자신의 생각을 종교 철학적으로 요약하였다. 유태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예수는 절망 속에 마비된 채로 가차 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눈으로 희망을 잃고 죽어야 했다는 것이다.
릴케는 그녀의 글에 대해 큰 감동을 받았다면서 “나는 그대에게 장미를 선물하려고 시내에서 한 줌의 장미를 사들고 영국정원 입구로 달려갔다.”고 적었다. 1897년 5월 13일 불루멘스트라세 8번지의 “가장 은총이 많으신 여자”에게 보낸 릴케의 첫 편지가 이러한 정황을 증언한다. 릴케의 구애 전략은 ‘당신 앞에서 무릎 끊게 허락받는 이외에 다른 것은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36세의 살로메가 어떻게 이렇게 새파란 젊은 청년에게 마음이 동動했는지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니체가 한때 루와 함께 지내려 하였던 ‘거주 공동체’를 뮌헨 근처의 산악지대로 꼽았다는 점에서 이들이 펼친 애정 행각을 연결할 수 있을 듯하다. 릴케가 살로메 앞에서 무릎 끊고 무엇을 하고 싶어 했는지도 상상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살로메와 릴케 사이에 어디까지 상황이 진척되었는지를 상상하게 하는 구절로서, 나중에 살로메는 릴케의 수음과 발기 문제도 말하기도 했다.
살로메, 릴케, 프리다 폰 뷜로브 3명은 5월 말 뮌헨 남서쪽 4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볼프랏츠하우센의 스타른베르거 호수로 소풍을 떠난다. 릴케는 당시 징집명령서를 받고 있었다. 당시나 요즘이나 군대를 가야하는 젊은이는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뜨거운 가슴으로 타오르게 마련이다. 릴케는 급하게 프라하로 떠나고 난 뒤 신체적인 부적합 판정으로 징집면제를 받자 ‘자유롭고 곧 또한 기쁘다’며 전보를 친다. 그리고 고독한 별들 가운데 터져 나온 로켓처럼 감격과 감동으로 그녀에게 달려가 기쁨을 전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격렬하게 구애하였다.
1897년 6월 7일부터 두 사람이 주고받는 언어가 변했다. 독일어에서 ‘너’는 서로 간에 가장 가까워졌을 때 부르는 호명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너’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때 살로메는 릴케의 이름이 여성적이라며 개명하라고 해서, 릴케는 르네라는 이름을 라이너라는 이름으로 갈아치워 버린다.
살로메와 릴케는 1897년 6월 14일 볼프랏츠하우젠의 이저탈에서 여러 날을 머물면서 여름을 오붓하게 함께 보낼 장소를 탐색하였다. 그들은 7월 20일부터 10월까지 지낼 장소를 산악지대 농가의 시골집으로 결정하였다. 릴케가 ‘루프리드’라는 집 이름을 주었던 아이흐하임벡의 집에서 1달 동안 머물렀을 때 건축가 아우구스트 폰 앤델이 ‘루프리드’ 집에 깃발을 꼽고 돌아갔고, 바서만도 이따금 방문하였다.
살로메가 릴케에게 더 아름다운 손 글씨로 ‘나를 사랑해보라’고 하였다. 릴케는 ‘하나님’을 ‘너’에게로 향한다는 시를 썼다.
“눈을 감아도 너를 볼 수 있고, 귀를 막아도 너를 들을 수 있고, 발이 없어도 너에게 갈수 있고, 입을 봉해도 너에게 맹서할 수 있고, 내 팔을 분질러도, 너를 한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내 심장이 멈추어도 내 두뇌는 움직이고, 네가 내 두뇌에 불을 질러도 나는 내 피에 너를 흐르게 할 수 있다.”
릴케와 루가 시골집에 머무는 시기에 남편 안드레아스가 1897년 7월 23일에 뮌헨으로 ‘롯데’라고 부르는 개를 데리고 왔다. 시기와 질투로 무슨 일이 있는지 감시하러 왔을 것이다. 그가 전보로 자신의 도착을 알렸기 때문에 살로메는 준비를 단단히 하고 눈을 똑바로 뜨고 표정관리를 하였다.
그녀는 이미 36세이고 그녀의 오랜 성적인 금욕 생활은 여성성, 사랑, 에로틱, 섹슈얼리티와 본질적인 갈등관계에 있다. 연구에 따르면, 그녀는 수많은 구애를 받았지만 그녀가 릴케와 성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여전히 처녀였다고 한다.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많은 평가로 보인다.
안드레아스가 1달 동안 머물다가 10월 1일에 베를린으로 돌아가자 살로메가 10년간의 결혼 생활에서 비밀리에 묻어두었던 의사 피넬레스 체맥이 연인으로 부상하였다. 살로메는 릴케와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미친’ 사랑에 빠졌으면서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인근의 할레인으로 피넬레스를 만나러 갔다. 살로메가 팜므 파탈레femme fatale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도 이러한 뜨거운 여름의 사랑 이후에도 이와 같이 이어나간 곡예사의 사랑 때문으로 보인다.
살로메는 베를린 템펠호프 큰집에서 샤를롯덴부르크 빌머스도르프의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가 식모 마리에를 고용한 다음 1892년 10월부터 빌라 발트프리덴에서 살았다. 릴케는 살로메를 쫓아 곧장 베를린으로 따라나섰다. 릴케는 샤를롯덴부르크 빌머스도르프에 가구가 딸린 집에 살다가 살로메 안드레아스 부부가 살고 있는 빌라 발트프리덴으로 이사한다. 릴케는 매일 살로메를 방문하였다. 살로메는 주방을 거주 공간과 작업실로 이용하면서 릴케를 맞아들였다.
살로메가 특별한 러시아 요리를 내어 놓는 날에는 릴케의 미각이 어쩔 줄 몰랐다. 남편은 도서실과 연구실 겸용 방에서 지냈다. 3 사람은 거실에서 함께 먹고 마시고 토론하고 공부하고 인근의 숲길인 그루네발드로 산책하곤 하였다.
살로메는 2 차례의 러시아 여행을 계획한다. 1차 여행은 남편과 릴케를 데리고 1899년 4월 25일 모스크바로 여행하여 4월 28일 71세의 톨스토이를 방문한다. 이때 릴케는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를 원어로 읽기 위해 러시아어를 배운다. 2차 여행은 1900년 7월 5일에서 8월 26일까지 릴케와 단둘이 볼가 강을 따라 나섰고 이때 소설가 보리스파스테르나크를 만난다. 릴케가 살로메로부터 니체 철학과 러시아 문화를 소개받으며 러시아에 대한 도취감에 도달했을 때, 살로메는 이별을 준비하였다.
살로메와 헤어진 레는 베를린과 뮌헨대학에서 3차례의 의학시험에 합격한 뒤에 의사가 되어 서프로이센의 형의 기사 영지에서 일했다. 그는 1900년부터 스위스 상트 모리츠 인근의 마을인 셀라리나로 옮긴 뒤 시골 의사로 일하다가 1901년 10월 28일, 산의 절벽에서 떨어져 자살 혹은 사망한다. 그의 시체는 니체가 머물던 실스마리아의 니체하우스에서 불과 13 킬로미터 떨어진 차르나듀랴 협곡의 인 강물에서 발견되었다.
살로메는 1903년 3월 베를린 베스트엔드의 큰집으로 이사하였고 1903년 6월 안드레아스가 1903년 6월 괴팅겐 대학교수로 부임하자 괴팅겐의 정원이 있는 큰 집으로 이사한다. 살로메는 릴케가 1903년 6월 23일 만나자 하자, ‘잘 가’라고 거부하였고, 릴케는 이별의 편지를 보냈다. “넌 나에게 가장 모성적인 여자였어. 넌 남자와 같은 친구였어. 여자, 당신이 바라볼 수 있는 방법, 그리고 더 자주 당신은 아이였어. 넌 내가 만난 가장 부드러운 사람이었고, 내가 씨름하기에 가장 단단했던 당신이었어. 넌 나에게 축복을 준 고귀한 존재였어. - 나를 삼키는 심연이 되었어.”
릴케는 조각가 클라라와 결혼 한 뒤에 프랑스 파리로 가서 로댕의 조수로 일하다가 다시 독일로 돌아와 1911년 10월에서 1912년 5월까지 약 8개월 동안 투른 운트 탁시스 후작부인의 식객으로 두이노성에 머물면서 두이노 비가를 쓴다. 두이노성은 20세기 초에 프란츠 리스트, 요한 슈트라우스. 빅토르 위고, 마크 투웨인, 프란츠 요셉 1세, 황후 시씨,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등이 즐겨 찾았던 장소다. 요즘은 독문학자나 관광객에 찾는 곳으로 릴케의 길은 한 시간 정도로 걸으면 다 돌 수 있는 2킬로미터 가량의 좁다란 산길이다. 성을 구경하다가 성의 절벽 아래의 해안가로 내려가면 요트를 탈 수 있는 시설과 카페와 음식점을 만날 수 있다.
릴케의 시적 재능은 유럽 지성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릴케는 당시 빈의 백만장자 유산의 상속자인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후원하였던 예술가의 한 명이기도 하였다. 릴케는 거센 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날 성벽에서 윙윙대는 바람 속에서 “누가, 내 소리친다 한들, 여러 서열의 천사들 중 내게 귀 기울일 것인가?”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어떤 한국인은 두이노성을 일컬어 릴케든 누구든 저절로 시가 쏟아지는 자리라고 했으니, 지중해 최북단에 놓인 트리에스트의 두이노 성은 아름다운 장소인 것만은 분명하다. 두이노성에는 원래 성주의 딸이 주변 마을의 청년과 사랑에 빠지자 이를 성가시게 여긴 성주가 청년을 감옥에 가두어 칼로 위협해 절벽으로 떨어뜨려 죽이자, 그를 찾아 나섰다는 백설 공주의 이야기도 있다. 릴케는 곧 수첩에다 성벽의 바위틈에 박힌 외마디 소리의 구절을 적었고 이어서 다음 구절이 나왔고 그날 저녁에 제1 비가를 완성하였다.
릴케는 1차 세계대전이 포성이 그친지 얼마 되지 않는 시기에 그의 마지막 거주지 스위스 뮈조성의 고독한 성채에 들어가 마침내 1922년 2월초에 「두이노의 비가」 10편을 완성했다. 뮈조성은 스위스 로잔의 레만 호수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이상 동남쪽으로 달리면 도달할 수 있는 곳으로 발레 주의 시에르라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나무아미타불’ 한 구절만으로 시를 완성하기에 충분했을 설악산의 봉정암과 비교하자면, 사랑과 삶과 죽음과 연민을 주제로 하는 릴케의 비가는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이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릴케는 “끝도 없고 상호 조건적인 관계의 분리할 수 없는 그물로” 엉킨 “모든 힘과 모든 사건, 모든 형태의 의식과 대상”에 대한 양자물리학의 이론을 시적 직관으로 읽는다. 어느덧 라이너에서 다시 르네로 돌아선 릴케는 뮈조성에서 아슬아슬한 지리학의 고독을 읊었다. “사랑하는 이여, 인생은 찬란하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세요. 죽을 때까지 도와주세요. 나는 의사들의 죽음을 원치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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