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은 해군 함정이고 세월호는 화물 여객선이다. 이 두 배는 각각 서해안에서 사고로 침몰하였다. 천안함은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해군 병사 전원이 사망하였고, 세월호도 선체 결함과 운행 조작의 부주의로 대부분 안양 단원고 학생들과 다른 승객들도 전원이 사망하였다. 전자의 희생자는 국가가 보상하였고 후자는 국가를 향해 손해 배상 소송을 청구하는 모양이다. 망자는 말이 없다. 이솝의 우화처럼 죽은 자의 슬픔을 함부로 말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배 전복 사건을 깨끗한 언어와 완벽한 프로토콜 언어로 규명하였다. 그러나 배 침몰 사건의 인과 관계에 대한 정설은 저만치 떨어져 있고 가설과 증명으로 전개된 갑론을박만 있다. 철학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플라톤은 『테아테토스』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통하여 철학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앎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당시 소크라테스는 청소년을 타락시키고 신성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기소당해 아리스토파네스가 『구름』에서 희극 무대에서 올려놓고 아테네 시민의 웃음거리로 만들어 놓은 마당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 판결 직전이라 내 코가 석 자이지만 자신보다 앞선 철학자 탈레스를 끌어들여 철학이 무엇이고 앎이 무엇인지를 한가하게 설명한다. 소크라테스는 탈레스가 밤하늘의 별들을 관찰하다가 우물에 빠졌는데, 트라키아의 한 하녀가 이 소식을 듣고 웃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야기인즉, 위의 하늘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던 철학자가 발밑에 무엇이 놓인 줄도 모르고 자빠져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점이다. 유식과 무지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순간이다. 히지만, 소크라테스는 탈레스의 우화는 같은 농담도 철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말을 보탠다. 철학자는 자신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을 말하려고 할 때, 트라키아 여인뿐만 아니라 나머지 군중에게도 배꼽 웃음을 선사할 줄 아는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즉, 철학은 어떤 웃기는 것을 업무로 삼는 학문으로 철학자는 남을 웃길 줄 아는 자다. 말하자면 천안함도 ‘자’빠졌고, 세월호도 빠졌는데, 과학과 정치만 나서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도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인류 최초로 기원전 585년 태양 일식을 예측한 천문학자가 어째서 자빠져 우물에 빠진 이유에 대하여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정말로 탈레스가 모르고 일부러 자빠졌는지는 현대에도 여러 학술적 시각이 존재한다. 관찰되는 별들의 대상의 직접성과 현재성은 이론현장에서 유한한 빛의 속도와 관련하여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근대의 베이컨은 탈레스가 우물 벽을 어두움으로부터 별들의 밝기 알기 위하여 우물 벽을 일종의 망원경 망통으로 활용하였을 것으로 본 적이 있다. 만약 탈레스가 인간의 이성이 하늘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하는 신들의 전횡과 횡포에 대해 질서가 잡힌 우주론을 제시하려는 의도로 천체를 관측하려 하였다면, 땅 위의 어떤 곳에 서있더도 신변의 위협에 대해 안전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차라리 땅 속 깊은 우물 속에 빠져서 천체 관측의 이론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플라톤은 무지와 무식이 판치는 감각 세계에서 진리에 속한 이데아 세계로 구분하고, 탈레스의 이미지를 투사한 소크라테스에게 탈레스의 지혜와 트라키아 하녀의 무지와 그녀의 웃음을 대비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형이상학』에서 탈레스 우화를 첫 번째 철학적 사건으로 기록하므로 탈레스를 철학사의 비조로 등록하였다.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탈레스는 올리브 열매를 겨울에 헐값에 사들였다가 나중에 시세차익으로 큰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는 일식예측으로 거부가 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현자의 역할을 강조하므로 철학은 무용하다는 세간의 주장을 반박하는데 탈레스 우화를 활용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지만 스승이 쓴 『테아테토스』도 읽지 않고 아카데미아에서 강의하는 스승의 이데아 론도 두 세계의 판명한 경계에서 해석하였다.
하이데거는 1920년대 후반 마르부르크 대학 강의에서 철학의 창시자가 별을 보다가 자빠지면서 철학적 사유가 전승되었다고 보면서 철학사의 길고도 긴『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어놓았다. 거기서부터 철학사는 운명적으로 자명한 위치의 상실로 특징지어지는 탈脫 근거의 자리에서 전승되었다. 그에 따르면, 현존재의 사유 운동은 원 사태에 대하여 거리 두기를 통하여 불안과 염려로 자신의 위치를 규정한다. 천안함이나 세월호가 침몰한 것이나 철학자가 곤두박질 한데에는 모두 다 위아래의 위치 규정에 관한 계획이 있다. 삶과 죽음이 오락가락하는 경계에서도, 밑에서 위를 쳐다보며 올라가다가 출구를 발견한 자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세월호 역사가 보여준 사실이었다. 탈레스 일화에서 트라키아 하녀는 철학자가 땅 위에서 위를 보다가 밑으로 자빠지는 모습을 보자마자 그녀의 상식에 비추어 웃기일로 간주하고 비웃었다. 멀쩡한 자가 그랬다면 구경꾼 위치에서 보면 고소 苦笑 할 수도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세계에서 원자론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경우들의 총체’라고 하였다. 여기서 경우라는 Fall이라는 명사는 독일어에서 Fallen이라는 동사에서 온다. Fallen은 떨어지다, 몰락하다, 빠지다, 함몰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Fall은 영어의 case로 번역하는데, case는 라틴어 cadere에서 유래하여 법정 송사, 몰락, 전복, 자빠짐, 등을 의미한다. 오늘날도 천안함과 세월호 사건의 생존자들과 구경꾼들은 지난 옛일을 잊지 말자며 기념한다.
탈레스의 자빠짐의 원사실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물에 빠지는 변을 당해 한 명의 구경꾼이 있었다는데, 오늘날에는 그 구경꾼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다는 특이점을 제시한다. 천안함과 세월호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특히 70대가 자빠져 웃음거리가 되는 경우를 조심하라는 것이다. 다만 배 난파 장면을, 현장에서 혹은 미디어를 통한 거리 두기로 바라보았던 구경꾼들로서, 혼자만 웃고 말았거나, 여럿이 웃었거나, 혹은 모두 웃었거나 울었는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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