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순수한 이론적 대상으로 인간에게는 절대거리다. 우주 한가운데 놓인 인간이 밑을 제외하고 주변으로 둘러보면 하늘이 아닌 곳이 없기 때문이다. 철학자 탈레스가 우물에 빠졌다. 밤하늘의 고개를 쳐들고 별을 보려다가 발밑에 무엇이 있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트라키아 시민 집안의 노예 출신인 하녀가 이 이야기를 듣고 웃었다는 이야기가 탈레스 우화다.
플라톤은 탈레스 우화에서 위의 것만을 보다가 아랫것을 보지 못한 철학자와 아래의 사태를 소상하게 알고 있던 하녀를 대비시켰다. 두 사람을 나란히 대비한다는 것은 양자를 객관이라는 이름으로 바라보겠다는 관점을 요구한다. 이러한 이론 작업을 주도하는 자가 구경꾼이고 구경꾼에게는 어떻게 보겠다는 관점이 있다. 이론은 보지 못하는 어떤 것으로 희랍어로 신적인 것을 보거나 구원을 본다는 테오리아라는 단어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테오리아를 구사하려면 구경꾼은 봄으로 사유를 시작하게 된다. 구경꾼은 사유가 사실 세계로 진입할 때 관조한다. 구경하려면 좋은 자리를 차지하여야 하고, 사유는 열심히 현실사태를 지성에 명중시키려 한다. ‘보다’와 ‘사유하다’ 사이에서 전통적 정의대로 진리란 지성이 대상에서 사유와 이루어내는 일치라면, 여기에는 말과 대상과 사태가 삼박자로 작동한다.
명중에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명중하는 대로 사유사태에 지성과의 일치가 일어난다. 1986년 챌린저 우주왕복선은 폭발로 목표를 비켜나갔다. 2010년 천안함이나 2014년 세월호도 사유사태와 지성 사이의 목표물 불일치로 끝났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목표를 스치거나 벗어나간다면 그 나머지는 역사와 구경꾼의 몫이다. 날아가는 화살 자체는 구경꾼의 관심을 받지만 날아가는 자체에만 집중하면 그만이다.
날아가는 화살 자신이 역사이면, 자신의 역사와 남의 역사가 구분되는 순간, 주변 역사는 불필요하다. 이론도 사유도 현실의 목표물 불일치의 문제 앞에서 별도리 없는 것이 사후약방문이다. 하지만 좋은 사후약방문은 나중에 필요한 이유는 자타의 역사 구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탈레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탈레스가 아테네 인근에서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별을 관측하다 우물에 빠졌다면 분명히 사건이긴 한데, 트라키아 하녀는 구경꾼의 자리에서 테오리아를 대변한다. 지혜와 무지가 대비되는 가운데 구경꾼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청년 시절의 칸트는 하늘과 땅 사이의 서로를 모르는 긴장에서 무지의 심연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칸트는 리스본 대지진과 같은 자연사의 사건을 보더라도, 우리의 무지는 무지로부터 깨우침을 얻지 못하므로 약점의 의식은 외부로부터 양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세계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므로 어떤 결정적인 술어에 대한 주어로도 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년 시절의 칸트는 이성사용의 최종 목표를 하녀의 무지에 대한 반성으로 정하고 그의 불후의 저작 『순수이성비판』을 기획하였다. 칸트는 다른 세계에 대한 직관지는 현재를 장악하는 오성이 약간 손해를 봄으로서만이 획득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이데거는 1925년 마르부르크 대학 여름학기 강의에서 탈레스가 우물에 빠져서 출구를 찾아 나섰을 때 감당해야 하는 당혹감을 주목하였다. 그 후 『사물이란 무엇인가?』에서 아리스토텔레스『형이상학』의 첫 문장‘모든 인간은 알기를 좋아한다.’를 전적으로 새롭게 번역하여 우물에 빠진 현존재의 상황에 적용하였다. 사람은 모름지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첫 문장에서 ‘안다’라는 것은 ‘보는 것’과 동격으로 놓고 인간 존재를 거리 지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다’라는 것은 생활세계의 내재적 연관에서 근심 걱정거리를 생각하며 염려한다는 뜻이다. 현 존재에게 가까이에 있는 현안은 지각될 수 있지만 멀리 놓인 대상은 알기 어렵다.
그렇다고 현존재의 탈 염려는, - 우물 바닥에 안주하고 있으면 - , 이것은 세계내존재 世界 內 存在의 결함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우물 추락 위험을 무릅쓰는 과정으로 본다. 말하자면 동양의 고전적 인물인 맹자가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모습을 보면 이를 붙잡아 구해주려는 마음을 측은지심이라고 분류했을 때의 상황과 같다.
하이데거는 스스로 멀어지는 곳에 현 존재라는 단어를 거기에 da 있음과 존재 Sein 사이에 연결한다. 절대적으로 보자면 가까이에서든 멀리에서든 봄이 없이 사유할 수 있으나 사유 없이는 볼 수 없다. 원숙한 시절의 칸트도 『순수이성비판』에서 직관 없는 개념은 맹목이고 개념 없는 직관은 공허하다고 하였다. 이것이 철학의 원 사실이다. 첫 철학자는 우물 주변의 현장에서 여전히 멀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현장에서 멀어져가므로 무지의 심연을 벗어났다. 철학이 ‘모두’를 위하여 출발한 것이 아니고, 그저 ‘씁쓸하게’ 시작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자연 자체가 트라키아 하녀의 역할에 들어오는 민감한 순간이 인류의 과학 역사에 들어왔다. 그것은 갈릴레이의 자유낙하 사유실험이나 토리첼리가 유리관 공기 무게 실험, 뢴트겐의 방사선 발견. 등과 같은 유비 상황에서 일어난 것으로, 철학자가 곤두박질하자 하녀가 이를 지각하였을 시점, 때, 순간부터 비롯되었다.
철학은 어떤 사람이 웃을 때 있었다. 하이데거의 헤라클레토스 강의를 들었던 한 물리학도가‘나는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철학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철학이 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물리학도의 모름이 철학에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몰랐으니 알려고 한 것이지, 알았다면 알려고 할 필요가 없었다.
하이데거는 현 존재 사유 운동을 거리 두기로 기술하며 철학자를 보고 웃는 하녀를 단수로 쓰지 않고 시종일관 복수로 사용하였다. 거리 두기는 대상을 손안에 넣고 手中 있음과 대상의 현전 現前 사이에서 절박한 간청을 대상성의 근거로 고지 告知 한다. 대상성의 사고는 세계 내 사유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세계의 존재는 단순히 환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상적 사유는 뚫고 들어올 수 없는 농도로 감추어져 있다. 거기서 물음과 답변의 개념은 맞았다 틀렸다 하기 어렵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고지는 누군가 들여다보거나 알고 싶은 정보를 자신의 주먹에 감추어두고 남을 애타게 만드는 미디어 전송과 같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는 주어에 물음에 대하여 개시 開示하지만, 주어는 세계 내에서 왜 그런지의 물음에 답변을 얻어가지 못한다. 왜, 장미가 꽃을 피우는지 묻는다면, 그냥 피므로 보여주는 것이지, 무슨 딴소리가 없다는 것이다.
물어진 것은 단지 역사적으로 거기 있는 현 존재 자신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주어에서 한 단어를 다른 의미로 전이시키는 쥐덫을 은유로 사용하여 설명한다. 쥐덫을 놓으면, 주어와 대상 사이의 타원 기하학적 증명은 기만적 보상을 약속한다. 첫 단어를 진술하는 자는 이 약속을 보증하지만, 반드시 만약 그러면 아닐 수도 있다. 이 입장은 상호작용이론의 전망에 따라 희생물을 살살 유혹하므로 서로를 흡족하게 만족하도록 행동하지 못한 당혹과 놀라움으로 개념의 승리자에게 선물을 가져다준다.
웃는 자의 입장이 한쪽으로 쏠리면, 우주 중심으로서 지구의 지위의 추락은 웃는 자들의 요구로 환원된다. 탈레스가 전복하였을 때 가장 염려되는 부분이 지구라는 특혜지점이다. 멀리 있는 것은 가까이 있는 것에 의하여서만이 인지된다. 거리 두기는 미시적인 빤한 곳과 거시적인 뻔한 것 사이의 인지이다. 구경꾼들은 하녀들과 더불어 차분한 마음으로 거리 두기로 웃으며 자신들의 이론 과잉을 예외로 믿는다.
순수하게 하늘을 보았다가 우물 안으로 곤두박질한 탈레스와 이를 마주 보는 하녀 사이에서 누가 먼저 웃었고 누가 누구를 웃겼는지의 물음은 여태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세계를 일어나는 경우의 총체’라고 본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분명히 트라키아 하녀의 입장이다. 러셀은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을 세계중심에 갖다 놓은 칸트 방식은 프톨레마이오스 반혁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좀 덜렁거린 감이 있다. 칸트가 돌려놓은 사태는 오직 이 한 사람, 곧 탈레스의 행복한 추락에 대한 기하학적 사태의 증명방법이 과학을 확실한 길로 이끌었다고 보았다. 폐위당한 세계중심에 인간이 들어선 것이나 거기서 넘어지거나 자빠져서 함께 뒹굴었는지는 원래부터 할 말이 없다. 동양철학을 좀 할 줄 아는 사람은 토 土에서 중심을 잡는다. 일주일에는 일 월 화 수 목 금 토가 있고, 토 다음에 일이 온다. 하늘과 땅 사이를 관망하는 구경꾼의 올바른 자세는, 물론 절에도 갈 수도 있겠지만, 교회에서 드리는 일요일 예배에 있다.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헤겔 좌파의 수장 바우어와 세금 징수 (7) | 2024.11.02 |
---|---|
프라하 카를 대교의 육각형 눈송이와 독일 울름의 밀랍 논증 (5) | 2024.10.28 |
말할 수 없는 것과 잔디밭 출입 금지 (17) | 2024.10.09 |
철학적 원 사실과 70대 (3) | 2024.10.03 |
독립문 하녀들과의 논쟁 (2) | 2024.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