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겔스가 1842년 경 연필로 드로잉한 베를린 프랑스 거리의 히펠 와인 카페 - (좌측부터 루게, 뷸, 나우베르크, 브루노 바우어, 비간트, 에드거 바우어, 스티르너, 메이옌, 익명의 3명, 의자에 앉은 베를린 불교도 퀩켄)-
청년 헤겔주의자들은 헤겔 강의를 직접 들은 1세대 제자들과 그들에게서 직간접적으로 배운 2세대 제자들이다. 그들은 1831년 헤겔 사후 1830년대 후반에 프로이센에 만연했던 억압적인 정치적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유 지식인의 토론 집단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대학에 발을 들려놓았다가 물러나 중도 하차했거나 언론계나 중고등학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현존하는 세계, 혹은 존재를 비판하는 방법으로 헤겔의 변증법을 채택하여 당시 독일 현실의 이성적 역사 발전의 원리를 해명하였다. 이들의 토론 동아리는 베를린을 위시하여 할레, 쾰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활동하면서 1838년 루게가 설립한「독일 과학과 예술을 위한 할레 연보」라는 기관지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였다. 그들은 헤겔 체계에 내재하는 보수주의에 반대하고 변증법적 사고를 프로이센과 독일 전반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적용하면서, 종교에 대한 급진적인 무신론, 혹은 국가의 폐지 또는 죽음을 요구하였다.
이들의 모임은 프로이센에서 처음에는 공식적으로 허용되었지만 1840년에서 1843년 사이에 급진화되고 정치화되면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통치하에서 이들 구성원의 학문적 경력은 탄압을 받았다. 이들은 내부의 이론적 차이의 증가로 빠르게 무너졌고 1845년에는 사실상 붕괴하였는데, 마르크스 엥겔스가 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 소멸 과정을 밝혔다. 이들이 만난 장소는 베를린 슈트라라우에서 시작하였다가 점차로 시내 중심가의 프리드리히 슈트라세의 히펠 와인 카페로 옮겨갔는데, 이곳을 방문한 인물들은 슈트라우스,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에드거 바우어, 애히터마이어, 루게, 헤쓰, 쾹펜, 류텐베르크, 나우베르크, 프르츠, 슈티르너, 마르크스, 엥겔스 등을 들수 있다.
슈트라우스는 1835년에『예수의 생애』를 출간하면서 헤겔의 동료나 제자들로 이루어진 1세대 그룹을 늙은 헤겔주의자 혹은 헤겔 우파로 구분하였고, 2세대의 젊은 세대의 청년 헤겔주의자들을 좌파로 부르면서 헤겔 좌파의 호칭이 시작되었다. 헤겔 좌파는 1836년경부터 베를린의 슈트라라우의 술집 정원에서 박사 클럽을 본거지로 먹고 마시고 열띤 토론을 벌이며 출발하였다. 스무 살의 마르크스가 1839년, 바우어의 발 앞에 앉아「이사야 강의」를 듣고 난 뒤에 모인 장소가 박사 클럽이며, 마르크스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런 사실을 밝히고 있었다.
바우어는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2학년이던 1829년 헤겔의 강의에서 칸트의 미학에 대해 학부 논문을 제출하여 헤겔의 철학 학부 상을 수여하여 주목을 받았다. 바우어는 칸트의 비판 철학이 궁극적으로 알 수 없는 ‘물 그 자체’ 의 주관적 지식이 갖는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헤겔의 변증법적 이상주의가 객관적 기반과 객관성을 위한 공간을 제공할 수 있으며, 헤겔의 변증법이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칸트의 미학과 헤겔의 변증법에 가교한 연구로 인정을 받으면 24세에 종교철학과 구약성서로 1834년 3월 15일, 박사 학위와 동시에 강사 자격을 취득하였고, 1834/34년 겨울 학기부터 1839년 여름 학기까지 베를린 대학에서 신약과 교회사를 강의하였다.
바우어는 1836년과 1838년에 정통 보수 헤겔주의자의 기관지「사변적 신학을 위한 저널」에서 유한한 자아 안에 있는 하나님 의식의 역사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역사의 통일을 증명할 성경 해석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를 위하여 주체-객체 분할에 묶인 역사 비평 방법 대신에 역사 과정에 진정한 지식으로 이어질 사변적 비판 방법이 필요하다. 그는 뒤이어 1838년에 발표한『원리의 역사적 발전으로서 구약의 종교』와『계시사 비판』에서 하나님 의식의 역사에 대한 종교 사상과 견해를 내적 변증법으로 추적한다. 바우어는 성경 경전에 대한 역사비판이 취약해서 극도로 보수적으로 보였지만 막상 파괴적인 공격을 시작하면서 베를린에서 평판이 나빠졌다. 마르하이네케는 극소수에 불과한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바우어가 베를린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을 가능성이 없어지자 본 대학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
바우어는「요한의 복음주의 역사비판」에서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복음서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복음서가 갖는 문학적 기원 때문에 예수에 대하여 ‘순전히 주어지고 적나라하게 실제적’ 내용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독교의 메시아로서 문학적 인물로 그리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지니는 기독교의 역사적 기반을 파괴하는 격이 되었다. 본 대학에서도 이러한 연구결과가 호평을 받지 못하자, 바우어는 이를 ‘구약의 계시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자신의 철학 체계와 일치하게 해온 신학적 결론이었다고 선언하고, 하나님 계시의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제시하려는 계획을 포기한다. 바우어의 강사 자격증 licentia docendi 취소되었고 본 대학에서 해고되었다.
바우어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프리랜서 작가가 되기로 하고 작품을 잇달아 출판하였다. 바우어는 마르크스가 쾰른에서 편집하고 발행하는「라인 신문」에도 글을 기고하였지만, 유대인 문제를 다루면서 마르크스와 사이가 틀어져 출판할 기회를 잃게 된다. 바우어는 1841년 10월, 무신론자이자 적그리스도인 헤겔에 관한 최후 심판의 나팔이라는 익명의『최후통첩』을 라이프치히에서 출판하였지만, 12월 검열에 출판물은 압수당했다. 바우어는 6월『헤겔의 종교와 예술 교리』라는 속편을 내놓았지만, 보수적 추종자들은 성경적 기독교와 헤겔 철학 사이의 모순을 볼 수 없거나 보고 싶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헤겔 좌파의 포이어바흐는『기독교의 본질』에서 ‘인간은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 homo homini deus’ 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슈티르너는『유일한 것과 주체』에서 에고 Ego는 개별 인간 ‘스스로에서만 하나님’이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헤겔 좌파는 헤겔 사유의 임계점에 도달한다. 신앙에서나, 생각에서나, 기도에서나 종교인에게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자의식의 투영일 뿐이므로, 객관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은 헤겔의 사유에서 설 자리가 없어졌다.
바우어는 헤겔 좌파들의 ‘자유인’의 좌장으로 매일 저녁 베를린 시내 중심가의 프리드리히 슈트라세에 있는 히펠 와인스투베에서 이전의 박사 클럽의 연속으로 비공식적 모임을 계속 주재하였다. 바우어는 1842년 중반부터 베를린 노이쾰른에서 그의 형인 에그베르의 소유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농부로 마구간에 도서관과 서재를 마련했으며, 파이프에서 나오는 담배 연기로 똥과 거름의 냄새를 가렸다. 바우어는 매주 나무 마차를 타고 마을로 이동하여 제과점에서 지난주 신문을 현물로 교환한 후 친구들을 방문한다. 바우어는 프로이센 의회 의원 자리를 놓고 4번이나 출마했지만 낙선하였다. 그의 선거에서 한편으로 국가 보호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조직화를 인정해야 한다고 연설했지만, 점점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바우어가 지역 주민들의 의식 속으로 내려가 능가할 수 없는 겸손 함을 지닌 사람이 된 것은 바로 자유로움 때문이었다. 결국, 바우어는 헤겔 우파로 돌아섰다. 부르주아지는 이제 역사적 과정을 마비시키는 모든 것을 구현한다. 부르주아지는 타고난 정치적 독립성,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능력, 실제 결정을 내리는 데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
헤겔이 본 현실의 합리성은 프로이센 국가 현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사회적 참여로 ‘합리적’ 생각을 현실로 만들려는 정치적 노력에 있다. 따라서 그는 계몽된 입헌군주제와 위로부터의 통제되지 않은 봉건 특정 권력에 반대하는 혁명을 선호한다. 헤겔의 이성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통일성에 관한 논제에서 보면, 봉건국가는 망해야 할 혹은 언제나 망해도 좋을 국가다. 이것은 국가 소멸론이나 폐지론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근대성의 합법화와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평가 사이의 균형을 무너뜨리면서 헤겔로부터 분명히 이러한 생각을 계승했다. 입헌군주제는 역사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 당대가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수준이다. 오늘날 실제 사회주의와 관련한 헤겔의 ‘존재의 정당화’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도 역사철학적 수준에 불과하다.
헤겔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필요는 필수품으로 제한될 수 있다고 본 루소의 생각과는 달리,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헤겔은 욕구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각각의 기준틀로 발전한다고 점을 알고, 집단 의지의 영향을 받지 않았음에도 생산 수단의 발전과 합리화로 산업 부문이 무너지면 실업이 발생한다는 점을 보았다. 이는 당시 산업혁명 단계에서 러다이트 Luddites 기계 파괴 운동 대신에 실업 보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러한 복지에 대한 생각은 라이프니츠가 이미 계산식을 세워놓아 대한민국 법전에도 적혀있다. 헤겔은 국가가 사회적 재분배 기능을 무시하면 부유층의 특권을 위한 국가 보안 장치의 비대화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다. 부자들의 큰 세금은 ‘질투를 줄이고 궁핍과 강도에 대한 두려움을 피한다’.
헤겔은 정부는 ‘고수익을 더욱 어렵게 만들므로’ ‘전반적인 불평등의 파괴’에 맞서 싸울 의무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독일 헌법」에서 ‘국가가 요구해야 하는 세금은 재산권의 폐지다.’라고 썼다. 헤겔은 사회에 대한 개인의 ‘권리와 주장’을 그 자신이 책임감 있는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본다. 자녀는 부모의 ‘재산’이 아니라 부모와 관련하여 독립적 법적 주체이므로, 국가는 아동 노동 금지와 의무 교육을 보장해야 한다. 세금은 모든 사람에게 재산 중 일부를 바치라는 요구이므로, 국가는 시민의 재산 중 일부를 거부할 수 있다. 세금 징수를 통해 재산이 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아무리 ‘재산권’이 ‘높고’, 오늘날 자유주의자나 로크가 요구하는 대로 아무리 ‘신성’하더라도 침해될 수 있고 침해되어야 한다.
헤겔의 생각을 비유적으로 말하면, 요즘 말하는 일제의 부당한 한반도 점령 시기의 ‘국가’를 아무리 ‘일본’이라는 문자로 박아놓아도, 한국인이 일본인 혹은 ‘일본’이라는 국적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제가 지배하고 통제한 재산권은 아무로 높고 신성해도 재산은커녕 개뿔만도 못한 권리다.
엥겔스는 세금 징수 자체를 아예 ‘공산주의적’이라고 여겼다. 마르크스가 정부로 하게끔 하여,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자와 함께 나누려는 공산주의는 이미 헤겔에 만들어놓은 관념론적 유물론의 ‘공산주의적 발상’에서 싹터 있었다. 헤겔 좌파의 역사는 헤겔을 따랐던 제자들의 행복하거나 혹은 안이한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 같은 3세대 제자의 빛에 의한 반조 反照에서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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