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신앙인과 하나님의 계시

record9218 2024. 11. 1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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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1년 보름스의 제국의회에서 카를 5세 황제 앞에 선 루터

 

서양은 2000년 이래 신앙을 두 가지 사안에 관련시킨다. 신앙은 어떤 무엇인가에 속하고, 어느 누군가를 믿는 것에 속한다. 어느 누군가를 믿으면 어느 누군가는 인격적 존재이고, 어떤 무엇을 믿으면 어떤 무엇은 사물에 관계한다. 어느 누군가를 믿고 어떤 무엇을 믿는다면, “어떤 주어진 사태를 참으로 받아들인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주어진 사태를 p라고 하였을 때, 인격과 사물이 분리되지 않는 한, 신앙은 p를 아는 자와 p를 믿는 자는 그건 그렇고 다를 수 없다.”라는 사태를 승인한다. 양자는 p의 사태를 참으로 보고 단숨에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전자는 현안이 되는 사태를 꽤 뚫기 때문에 알고, 후자는 꽤 뚫지는 못하지만, 사태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승인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과학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사태가 일어날 것을 이성으로 알고, 신앙인은 사태가 그렇게 일어날 것이 참이라고 신앙으로 믿는다. 여기서 신앙의 개념에 가시가 박혀있다. 신앙의 작용하는 세계에서 신앙인이 살아있는 신앙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지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신앙인이 그건 그렇고 다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이유는, 그러한 사태를 보증하는 어느 누군가의 인격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신앙인은 주어진 사태뿐만 아니라 자신이 신뢰하는 어느 누군가의 인격을 증인으로 자신의 신앙을 정당화한다.

 

마르틴 부버는 유태적 신앙개념에는 인격적 요소가 있으며 희랍적 기독교적 신앙개념은 사안이 되는 요소를 배타적으로 독점한다고 보았다. 그 점에서 전통의 기독교 신앙인은 누구나 어느 누군가의 말을 믿고’, 어느 때든지 한 인격에 쏠려있다. 물론 어느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어떤 무엇을 믿는다는 것을 섣불리 같은 선상에 올려놓을 수 없다. 신앙인은 어느 누군가의 확증을 참말로 받아들이고 주어진 사태를 참으로 받아들이지만, 믿는다고 했던 것이 전혀 현실에서 딴 판이 되는 일이 십상이다. 법정 판사가 피고석의 증인 진술을 받아들이고 이러 저러한 진술에 대하여 누군가 달리 말했던 것을 참조할 때, 신앙과 아무런 관계가 없이 판결이 튀어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앙드레 지드는 일기책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모든 다른 인간의 말보다 더 많은 빛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하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여전히 믿어야 한다면, “지금 나는 믿지 않는다.”라고 밀고 나갈 수 있는 반어를 숨겨야 한다. 어느 누군가의 언명을 신앙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역사에서나 현실에서, 본문과 본문의 이해를 통한 해석이 전혀 딴판으로 놀 때, 원문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신앙이 인격에 관여한다.”라고 할 때, 신앙을 의지와 관련시킨다. 의지로 원치 않고서는 신앙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의지 없이는 신앙도 없다. 루터는 어느 누군가를 믿는다.”어떤 무엇을 믿는다.”를 구분하므로 딴 판으로 놀아나는 세계의 사태를 예방하므로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였다. 1521417, 루터는 보름스의 카를 5세 황제와 독일 의회 앞에 서서 그동안 로마 교황청에 대항하였던 95개 반박 조항의 철회를 요청받았다. 그는 하루 동안 숙고한 끝에 거절이 죽음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인용하고 하느님의 말씀 속에 가두어 놓은 성경 구절 때문에 제 양심이 압도됩니다. 저는 어떤 것도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아멘!”.

 

황제는 보름스 칙령을 공포했다. 루터가 제국의회를 떠나면서 도피하는 동안 누구든지 루터를 죽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루터가 고향인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는 길에 어느 한 제국 관리가 그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루터는 마차를 타고 가는 길에 갑자기 숲속에서 공격이 일어나서 무장한 사람들에게 붙잡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알텐슈타인 성으로 끌려갔다. 작센 선제후 현자 프리드리히가 두대의 검정포장 마차를 위장으로 공격하여 루터를 보호하였고,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안전하게 데려가기로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아멘!’이라는 외침이 신기하게도 어느 누군가에 대한 믿음과 어떤 무엇에 대한 믿음의 일치를 가져오는 사건이 역사에서 일어났다. 루터는 기병의 관습에 따라 이중 옷과 긴 바지를 입고 머리에 빨간색 가죽 모자를 썼다. 루터는 15215월부터 15223월까지 거의 1년 동안 바르트부르크에서 살면서 12월부터 11주 만에 신약 성경 전체를 그리스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했다.

 

성경은 어떤 무엇에 대한 믿음이 어느 누군가의 믿음의 일치를 말하는 구절이 많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노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라고 한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 말씀은 해석하기 어렵지만, 어느 누군가의 어떤 인격적 존재의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루터의 성경 번역으로 말미암아 알게 된 말씀이 참되고 진실하므로 이를 읽고 듣고 믿는 자에게는 선물로 돌아온다는 말이다. 바라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타난 것은 물건이나 사물일 수 있으며 인격의 말과 관련되는 어떤 사태의 지시할 수도 있는데, 믿음의 질서는 양자의 일치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어느 누군가의 신앙은 자문자답에 해당하는 선험적 질문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안셀무스가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나요?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육을 입고 인간이 되었다는 명상을 하였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므로 우리의 삶의 일부에 하나님이 참여하셨다는 논증이다. 그러나 이는 검증할 수 없는 대상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지 告知 하는 어느 누군가의 인격의 말을 믿어야 받아들일 수 있다. 어느 누군가를 믿거나 어떤 것을 믿는 일에는 하나님이 어느 누군가의 인간이 되었다는 어느 누군가의 설교가 결정적이다. 어떤 것이나 어떤 사태에 대한 믿음을 어느 누군가의 증인을 통하여 어떤 무엇의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전망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군가를 믿는 자는 어느 누군가가 그에게 주는 믿음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의 사태를 현실적으로 참으로 받아들이므로, 그러한 증인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의 절대적인 무조건 승인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그를 매일 인간적 파트너로 직접 만나지 않아도 좋다. 일주일에 한번이면 족하다.

 

서양의 근대는 하나님, 자연, 인간을 하나로 귀일 시킨다. 이는 우리의 조상이 옛날부터 천지인을 합일로 보았던 사고방식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하였고 주역은 하늘은 귀하고 땅은 천하나 음양 陰陽 불측 不測을 일컬어 신 이라고 적고 있다. 단지 단어가 표현하는 대상의 명칭이 달랐을 뿐이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였고 자연은 일어나는 그대로로 인간은 양자와 하나다. 인간이 사물과 소통하는 길에 자연, 기계, 수의 언어가 있으며, 인간이 수의 언어를 알면 자연과의 소통이 일어난다. 유명한 튜링이 사물과 사유를 잇는 인공기계를 계발하여 인지능력을 확장하므로 인공지능의 세계를 예비할 수 있었다.

 

만약 하나님이 말을 건넬 수 있는 인격적 본질이시라면, 우리는 하나님과 유의미한 대화로 소통할 수 있다. 하나님이 말을 하실 줄 아는 존재라는 점을 전제한다면, 하나님이 계시하신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표상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떤 무엇으로 소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군가이고 어느 누군가의 말속에 숨어 계신다. , 내가 사람과 사물에 말을 걸면 말이 걸려온다는 점에서 계시와 믿음의 결과는 귀신이 일하기 나름이다. 나 스스로 하나님에 대하여 열린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하므로, 우리는 말씀으로 우리 자신이 어떤 무엇을 알고 어느 누군가를 믿는지를 인정할 수 있고 하나님의 계시를 영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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