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는 1856년 5월 6일 체코의 프르지보르에서 유태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족이 1860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사하면서 1873년에 빈 대학에 들어가 1881년 의학박사를 받았다. 프로이트는 1882년에 의사, 1885년에 빈 대학의 신경 병리학 강사로 임용되어 1902년에 부교수 1920년에 정교수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나치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1938년 여름 영국으로 망명하여 1939년 9월 23일 런던에서 사망했다.
빈의 중심가 베르크가세 19번지의 프로이트 박물관에는 그가 생전에 남긴 유품을 보존하고 있다. 황제들이 태어나고 거주하였던 호프부르크 황궁과 쉔브론 궁전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있지는 않다. 쉔브론 궁전에서 프로이드 박물관으로 걸어가면 빈에서 두 번째로 높은 99미터 높이의 봉헌 교회를 쳐다보게 된다. 이 교회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프로이트 심리학 이론에 얽힌 역사적 사회적 콤플렉스를 보여주는 듯하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요셉 황제가 1853년 2월 18일 숙련공 재단사에 의한 암살 시도에 목숨을 건지자 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이 교회 건축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다. 형님 황제 폐하의 만수무강을 지켜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한다.’는 보티프votiv라는 이름을 갖는 교회 건물에는 예루살렘 감람산에서 채취한 화강암을 가져와서 석자제로 사용하였을 정도로 공이 많이 들어갔다. 내부에는 3개의 대형 오르간을 비롯하여 주 제단 이외에 네 개의 예배당과 설교단이 들어서 있다. 이 교회가 1879년 4월 20일에 완공되었을때, 프로이트는 빈 대학의 의과 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은 합스부르크 황실 서열에는 일찌감치 밀려나 있어서 릴케가 머물렀던 두이노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리메라 성을 짓고 살았다. 그는 유럽 정치에 파생된 힘의 관계에서 1864년에 멕시코 황제의 왕관을 받아들였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황실 서열 1순위로 아들인 루돌프를 황태자로 삼았는데 그는 1889년 자살하였고, 차 순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는 부부가 세르비아 지역에 군사 사열을 받으러 갔다가 1914년 사라예보에서 시해되었다. 다민족 국가의 화약고인 세르비아에서 난리를 당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사망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차 세계 대전은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너희가 우리를 쳐, 나도 칠거야. 내가 돌보는 애들을 왜 건드려, 너도 맞아보라 라는 묻지마 방식의 전쟁이었다.
프로이트는 1891년에 지금「프로이드 박물관」이 있는 자리에서 정신과 병원을 개업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파리의 샤르코, 빈의 브로이어와 함께 히스테리 치료에 새로운 연구방법에 전념하였다. 히스테리는 인도 유럽어족에서 ‘신체의 튀어나온 부분’으로 자궁이라는 용어와 관련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자궁 떨림증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당시까지는 히스테리를 여성의 자궁질환으로 인해 발생하는 일종의 신체적 심리적 장애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히스테리를 아이의 출산을 원하는 생물로 보아 자궁에 정기적으로 정액이 공급되지 못하면 몸 안에서 돌아다니다가 질식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의 치료 방법으로 최면, 전기충격, 혹은 음핵절제술까지도 활용되는 가운데, 유아 시절에 성적 본성이 억압된 사건에서 히스테리의 기원을 찾았고, 1899년 『꿈의 해석』에서 인간 정신의 욕망과 환상에서 무의식적 의미를 분석하였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들 가운데 다시 치료받지 않고 도망친 환자들의 강한 저항과 반대를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1917년 『심리 분석으로부터 심리 분석에 놓인 어려움』에서 환자들과 치료 방법 사이에 놓인 장애물을 자기애의 모욕적 형태로 제시하였다. 프로이트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대신 환자들을 모욕하고 조롱하며 자랑스러워하였다. 환자들이 도망 다니지 못하게 반대 공격에 나섰을 때 그들의 방어 태세가 자신의 이론이 맞다는 점을 가리킬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저항 활동에 대해 그들을 모욕하므로 자신의 이론적 성공을 보여줄 수 있다. 심리 분석은 인간의 자기 가치 감정을 약화시키고 기존의 사고에 맞서 스스로를 주장해야 할 것을 생각하는 작업인데, 자신의 무의식 이론의 ‘큰 가르침은’ 인류의 강한 감정을 상하게 하므로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보면, 과학 지식의 진보에서 인류의 의식은 순진한 나르시시즘에서 세 가지의 중요한 상처를 받았다. 첫 째 상처는 지구가 우주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 발견에 관련된 우주론적 모욕이다. 두 번 째 상처는 인간이 동물 계열에서 나왔다는 찰스 다윈의 발견에서 오는 생물학적 모욕이다. 세 번째 상처는 자아가 자신의 집 주인이 아니라는 심리적 모욕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보여주었고, 다윈은 인간이 스스로를 동물계의 정점에서 창조의 왕관으로 보는 것을 금했다. 프로이트는 원숭이와 본질적으로 차이를 벌리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인간이 자신의 집주인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나’는 무의식적 영혼의 초라한 소식으로 살아간다.
인간은 동물의 시리즈에서 나왔고 다른 종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동물과 다를 바 없고 나을 것도 없다. 인간은 생태계의 시스템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시스템을 통제할 수 있는 것과는 별도로 살아간다. 복합 생태계가 전체 생물권에 통합되어 있을 때 집주인은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스스로를 볼 수 없다는 통찰에서 생태학적 모욕을 느낀다.
프로이트는 자아의 어딘가에 자신의 움직임과 행동에 대한 감독 기관이 메시지의 완전성과 신뢰성, 명령 전달을 기계론적으로 수행하는 이론을 고안하였다. 성적 본능은 길들여질 수 없고 무의식적으로 덥혀있지만 불완전하고 신뢰할 수 없는 인식을 통해서만 지배를 받는 에고가 가능하다. 그는 그것을 무의식적인 이드id라고 부르고, 그것은 외부세계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이드와 외부 세계 사이의 충돌에서 ‘나’는 항상 규제되고 중재되는데 이를 일컬어 에고ego라고 한다. ‘나’와 나의 표상 사이에서 표현되는 외부 세계를 심리적으로 재현하는 무대가 영혼이 접속된 물리적 지각의 장이다.
프로이트는 환자와 시술자와 자리를 같이하는 카우치에서의 임상 과정에서 자연과학적 기계론에 의존하는 치료 방법을 도입한다. 이드와 에고 사이에는 초자아, 곧, 슈퍼에고super ego라고 하는 것이 ‘나’를 이상으로 이끌고 가려고 한다. 세속적인 우리말로 옮기자면, 이드라는 ‘거시기’ 때문에 쌍시옷으로 발음으로 욕설이 터져 나오는 지경에 이른다. 슈퍼에고는 어쩔 줄 몰라 한다. 이상적인 것에 도달하려는 슈퍼에고의 노력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근친 상간하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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